인평대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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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
1622년 능양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이듬해 아버지가 [[인조반정]]으로 즉위하면서 [[1629년]] 왕명으로 인평대군에 책봉되었다. [[병자호란]] 후, 두 형 [[소현세자]], [[조선 효종|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다.<ref name="pyk">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p.339, {{ISBN|8901047543}}</ref> 오단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인평대군은 효종 즉위 후까지 살아남은 효종의 유일한 동복 아우였기에 효종은 인평대군과 우애가 좋았으며 그 아들들 또한 총애했다.<ref name="ldi">이덕일, 《윤휴와 침묵의 제국》 다산초당, 2011, p.170~p.171, {{ISBN|9788963705712}}</ref>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의 총애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ref name="lhw">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77, {{ISBN|9788950918941}}</ref>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집안 사람처럼 후히 대접하였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ref>《효종실록》 18권, 8년(1657년) 2월 14일 1번째 기사</ref> 효종의 아들 [[조선 현종|현종]] 또한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조선 숙종|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삼복 형제들을 대접하였다.<ref name="ldi"/><ref name="lhw"/> 숙종의 외척인 [[김우명]]과 [[김석주]]는 삼복 형제의 외숙부들이 남인 정권의 실세인 [[오정위]], [[오정일]] 등임을 경계하였고,<ref>이상각, 《화경 숙빈 최씨》 케이엔제이, 2010, p.88, {{ISBN|9788994080048}}</ref> 어리고 후사도 두지 못한 숙종에게 변고가 생기면 왕위가 인평대군의 아들들에게로 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때문에 이들 형제를 제거하려 하였다.<ref name="ldi"/> 이로 인해 일찍 죽은 복녕군을 제외한 나머지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훗날 [[삼복의 변]]에 연루되었다.<ref>후에 장남 복녕군의 5대손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며, 그 손자 재황은 대한제국의 황제 [[대한제국 고종|고종]]으로 즉위했다.</ref> 1658년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ref>《효종실록》20권, 9년(1658년) 5월 13일 1번째 기사</ref> 묘는 [[경기도]] [[포천시]]에 있다.
1622년 능양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이듬해 아버지가 [[인조반정]]으로 즉위하면서 [[1629년]] 왕명으로 인평대군에 책봉되었다. [[병자호란]] 후, 두 형 [[소현세자]], [[조선 효종|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다.<ref name="pyk">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p.339, {{ISBN|8901047543}}</ref> 오단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인평대군은 효종 즉위 후까지 살아남은 효종의 유일한 동복 아우였기에 효종은 인평대군과 우애가 좋았으며 그 아들들 또한 총애했다.<ref name="ldi">이덕일, 《윤휴와 침묵의 제국》 다산초당, 2011, p.170~p.171, {{ISBN|9788963705712}}</ref>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의 총애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ref name="lhw">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77, {{ISBN|9788950918941}}</ref>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집안 사람처럼 후히 대접하였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ref>《효종실록》 18권, 8년(1657년) 2월 14일 1번째 기사</ref> 효종의 아들 [[조선 현종|현종]] 또한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조선 숙종|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삼복 형제들을 대접하였다.<ref name="ldi" /><ref name="lhw" />
숙종의 외척인 [[김우명]]과 [[김석주]]는 삼복 형제의 외숙부들이 남인 정권의 실세인 [[오정위]], [[오정일]] 등임을 경계하였고,<ref>이상각, 《화경 숙빈 최씨》 케이엔제이, 2010, p.88, {{ISBN|9788994080048}}</ref> 어리고 후사도 두지 못한 숙종에게 변고가 생기면 왕위가 인평대군의 아들들에게로 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때문에 이들 형제를 제거하려 하였다.<ref name="ldi" /> 이로 인해 일찍 죽은 복녕군을 제외한 나머지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훗날 [[삼복의 변]]에 연루되었다.<ref>후에 장남 복녕군의 5대손 [[남연군]]은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며, 그 손자 재황은 대한제국의 황제 [[대한제국 고종|고종]]으로 즉위했다.</ref>
1658년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ref>《효종실록》20권, 9년(1658년) 5월 13일 1번째 기사</ref> 묘는 [[경기도]] [[포천시]]에 있다.


[[정묘호란]] 때의 공로로 [[1628년]] 원종공신 1등에 올랐으며 1646년(인조 24)에 영국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부인 복천부부인은 감사 증 의정부우의정 오단의 딸이다. 오단의 후손들은 후일 [[남인]]에 가담하게 된다.
[[정묘호란]] 때의 공로로 [[1628년]] 원종공신 1등에 올랐으며 1646년(인조 24)에 영국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부인 복천부부인은 감사 증 의정부우의정 오단의 딸이다. 오단의 후손들은 후일 [[남인]]에 가담하게 된다.

2018년 10월 30일 (화) 23:47 판

인평대군
麟坪大君
대군(大君)
이름
이요
李㴭
별호 자(字)는 용함(用涵)
호(號)는 송계(松溪)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신상정보
출생일 1622년 12월 10일(1622-12-10)
출생지 조선 한성부 정원군 사저
사망일 1658년 5월 13일(1658-05-13) (향년 35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대군 사저에서 병사
부친 능창대군 이전(양부)
인조 이종(생부)
모친 능창대군 본부인 능성 구씨(양모)
인렬왕후 청주 한씨(생모)
배우자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오단(吳端)의 딸)
자녀 슬하 6남 4녀(이외 양자 2명)
친장자 복녕군 이유(福寧君 李栯)
친삼자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친오자 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
친육자 복평군 이연(福平君 李棩)
양칠자 경완군 이석린(慶完君 李石磷)[1]
양팔자 서평군 이요(西平君 李橈)[2]
기타 친인척 평운군 이구(양숙부)
양원군 이환(양손자)
임영군 이의저(양손자)
오단(장인)
신성군 이후(양조부)
정원대원군 원종 이부(친조부)
오강군 이건(양증조부)
선조 이연(친증조부)
임해군(종조부)
광해군 이혼(종조부)
의창군 이광(종조부)
경창군(종조부)
흥안군(종조부)
영창대군(종조부)
평운군(종조부)
능원대군(작은아버지)
창임군(5촌 숙부)
소현세자(동복 형)
효종(동복 형)
용성대군(동복 아우)
효명옹주(이복 누이동생)
숭선군(이복 남동생)
낙선군(이복 남동생)
종교 유교(성리학)
묘소 경기도 포천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 1622년 12월 10일 ~ 1658년 5월 13일)은 조선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이다. 성은 이(李), 본명은 요(㴭), 본관은 전주(全州), 는 용함(用涵), 아호는 송계(松溪),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아버지 인조에 의해 아들 없이 죽은 삼촌 능창대군의 사후양자로 입양되었다. 따라서 남연군의 호적과 일제 강점기 당시 흥친왕, 영선군 이준용의 호적에는 능창대군의 후손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생애

1622년 능양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고, 이듬해 아버지가 인조반정으로 즉위하면서 1629년 왕명으로 인평대군에 책봉되었다. 병자호란 후, 두 형 소현세자,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왔고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로 청나라를 방문했다.[3] 오단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인평대군은 효종 즉위 후까지 살아남은 효종의 유일한 동복 아우였기에 효종은 인평대군과 우애가 좋았으며 그 아들들 또한 총애했다.[4] 인평대군이 서인들로부터 몇 차례 모함을 받았을 때도 효종의 총애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5] 인평대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에는 집안 사람처럼 후히 대접하였고 희귀한 물건을 두고 승부를 벌이기도 하였다.[6] 효종의 아들 현종 또한 사촌인 인평대군의 아들들과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내며 조정 일에 참여시켰고, 외아들로 태어나 가까운 종친이 없었던 숙종 또한 오촌 당숙인 삼복 형제들을 대접하였다.[4][5]

숙종의 외척인 김우명김석주는 삼복 형제의 외숙부들이 남인 정권의 실세인 오정위, 오정일 등임을 경계하였고,[7] 어리고 후사도 두지 못한 숙종에게 변고가 생기면 왕위가 인평대군의 아들들에게로 갈지도 모른다는 위험성 때문에 이들 형제를 제거하려 하였다.[4] 이로 인해 일찍 죽은 복녕군을 제외한 나머지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훗날 삼복의 변에 연루되었다.[8]

1658년 인평대군의 병세가 위독하자 효종이 직접 집을 찾아갔으나 임종을 보기 전에 죽었다.[9] 묘는 경기도 포천시에 있다.

정묘호란 때의 공로로 1628년 원종공신 1등에 올랐으며 1646년(인조 24)에 영국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부인 복천부부인은 감사 증 의정부우의정 오단의 딸이다. 오단의 후손들은 후일 남인에 가담하게 된다.

인물

인평대군은 제자백가에 정통하였고 시서화에 능해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에 비유되기도 했다.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을 찾은 청의 화가 맹영광과 교류하기도 했다.[3] 〈고백도〉,〈노승하관도〉,〈산수도〉와 같은 작품을 비롯해 〈송계집〉,〈연행록〉,〈산행록〉같은 저서를 남겼다.

저작

저서

  • 《연행록 (燕行錄)》
  • 《송계집》
  • 《산행록 (山行錄)》

작품

  • 〈산수도〉
  • 〈노승하관도 (老僧遐觀圖)〉
  • 〈고백도 (古栢圖)〉

가족 관계

  • (실제) 아버지 : 인조
  • (실제) 어머니 : 인렬왕후
  • 생 계모 : 장렬왕후
  • (법적) 아버지 : 능창대군 - 인조의 동생[10]
  • 양 서모 : 이름 미상, 노비 출신
    • 양 서여동생 : 향주 이영온(李英溫), 포천현감 허교의 아들이자 허목의 동생 허서에게 출가.
  • 장인 : 오단(吳端, 1592년 - 1640년 5월 10일)
    • 부인 :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 (1622년 4월 22일 - 1658년 8월 6일) - 증 영의정 오단(吳端)의 딸 : 6남 4녀를 낳았으나 차남, 4남과 딸 둘은 요절했다. 인평대군이 죽었을 때 임신 중이었는데 남편의 죽음 후 건강이 악화되어 낳지 못하고 죽었다. 이 때 장남과 삼남인 복녕군과 복창군은 군호를 받고 결혼한 상태였으나 나머지 2남 2녀는 어렸는데 현종이 고아가 된 사촌 형제들을 궁궐에 들여서 키웠다.
      • 장남 복녕군(福寧君) 이유(李栯, 1639년 - 1670년)[11]
      • 차남 요절
      • 삼남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1641년 - 1681년)
      • 사남 요절
      • 오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1647년 - 1680년)
      • 육남 복평군(福平君) 이연(李棩, 1648년 - 1682년) - 동생 용성대군의 양자로 입양[12]
      • 장녀 향주 이금온(李金溫) - 풍양 조씨 조기수(趙祺壽)에게 하가
      • 차녀 - 향주 해주 정씨 정중만(鄭重萬)에게 하가
      • 삼녀 요절
      • 사녀 요절

같이 보기

각주

  1. 생부는 소현세자 이왕.
  2. 생부는 화춘군 이정.
  3.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p.339, ISBN 8901047543
  4. 이덕일, 《윤휴와 침묵의 제국》 다산초당, 2011, p.170~p.171, ISBN 9788963705712
  5. 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77, ISBN 9788950918941
  6. 《효종실록》 18권, 8년(1657년) 2월 14일 1번째 기사
  7. 이상각, 《화경 숙빈 최씨》 케이엔제이, 2010, p.88, ISBN 9788994080048
  8. 후에 장남 복녕군의 5대손 남연군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며, 그 손자 재황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으로 즉위했다.
  9. 《효종실록》20권, 9년(1658년) 5월 13일 1번째 기사
  10. 고종 6대조 이혁 묘 출토유물 문화재 지정
  11. 栯은 산앵두 욱, 나무이름 유의 두 가지 음으로 읽을 수 있다.
  12. [광주갈피갈피] 태봉산 :: 광주드림 - 시민공감 지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