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중 (168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새 문서: 신구중(愼龜重, 1682년 11월 10일 ~ 1744년 7월 27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자(字)는 원서(元瑞), 호(號)는 외와(畏窩),...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2번째 줄:


== 생애 ==
== 생애 ==
아버지는 신승복의 7대손인 [[삼수]][[현감]] 신지일인데, [[신승선]]의 7대손이자 [[신수근]]의 6대손 [[통덕랑]] 신휘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아버지는 신승복의 7대손인 [[삼수]][[현감]] 신지일인데, [[신승선]]의 7대손이자 [[신수근]]의 6대손 [[통덕랑]] 신휘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711년]](숙종 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으로 재직 중 [[1727년]](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21등으로 급제하였다.
[[1711년]](숙종 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으로 재직 중 [[1727년]](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21등으로 급제하였다.
10번째 줄: 10번째 줄:
이후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으로 나갔다. 용강현령 재직 중, 조정 고위 관직의 서자가 행패를 부려 아무도 제지못하는 것을 엄벌에 처하였다. 이후 그 고위직의 미움을 사서, 신상에 해로울 것을 예상하고 [[1733년]]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으로 나갔다. 용강현령 재직 중, 조정 고위 관직의 서자가 행패를 부려 아무도 제지못하는 것을 엄벌에 처하였다. 이후 그 고위직의 미움을 사서, 신상에 해로울 것을 예상하고 [[1733년]]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739년]] [[단경왕후]] 복위과정에서 영조가 친히 [[단경왕후]]능에 거동 후 그를 불러서 특별히 대접하고 그를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 고관으로 부터 공을 혹평하고 이를 막아 기용되지 못하였다.
[[1739년]] [[단경왕후]] 복위과정에서 영조가 친히 [[단경왕후]]능에 거동 후 그를 불러서 특별히 대접하고 그를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 고관으로 부터 공을 혹평하고 이를 막아 기용되지 못하였다. 그해 [[8월]] [[병조]][[정랑]]에 제수되고 [[비변사]]낭청을 겸임하였다. [[1742년]](영조 18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고 그해 [[6월]]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 이르렀다.
[[1742년]](영조 18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고 그해 [[6월]]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 이르렀다.


[[1789년]](정조 14년) [[증직|증]] 가선대부 [[예조]][[참판]](贈 嘉善大夫 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으로 [[추증]] 되었다.
[[1789년]](정조 14년) [[증직|증]] 가선대부 [[예조]][[참판]](贈 嘉善大夫 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으로 [[추증]] 되었다.

== 관련 항목 ==
{{Col-begin}}
{{Col-2}}
* [[단경왕후]]
* [[신수근]]
* [[신승선]]
* [[신후담]]
* [[허후]]
* [[허목]]
* [[윤휴]]
{{Col-2}}
* [[윤선도]]
* [[이서우 (1633년)|이서우]]
* [[중모현주]]
* [[거창군부인 신씨]]
* [[이인좌의 난]]
{{Col-end}}

== 참고 자료 ==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 영조실록
* 성호사설


[[분류:1682년 태어남]]
[[분류:1682년 태어남]]

2018년 9월 13일 (목) 14:50 판

신구중(愼龜重, 1682년 11월 10일 ~ 1744년 7월 27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자(字)는 원서(元瑞), 호(號)는 외와(畏窩), 원서당(元瑞堂)이고, 본관은 거창이다.

생애

아버지는 신승복의 7대손인 삼수현감 신지일인데, 신승선의 7대손이자 신수근의 6대손 통덕랑 신휘오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711년(숙종 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通德郞)으로 재직 중 1727년(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21등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년) 8월 승정원가주서가 되었다. 그해 11월 병이 있는 가주서 권집 대신 다시 승정원가주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좌승지 채성윤(蔡成胤)의 건의로 군직을 겸직하였다. 11월 12일에 사직했다가 그해 12월 다시 사변가주서로 임명되고 좌부승지 이중관(李重觀)의 건의로 군직을 겸하였다. 같은 달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 좌의정 조태억(趙泰億)의 집에 파견되어 명소패를 전달하고 돌아왔으며, 그달 말 의금부에 연행되어 추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용강현령으로 나갔다. 용강현령 재직 중, 조정 고위 관직의 서자가 행패를 부려 아무도 제지못하는 것을 엄벌에 처하였다. 이후 그 고위직의 미움을 사서, 신상에 해로울 것을 예상하고 1733년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739년 단경왕후 복위과정에서 영조가 친히 단경왕후능에 거동 후 그를 불러서 특별히 대접하고 그를 기용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 고관으로 부터 공을 혹평하고 이를 막아 기용되지 못하였다. 그해 8월 병조정랑에 제수되고 비변사낭청을 겸임하였다. 1742년(영조 18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고 그해 6월 아들 신후담이 정리한 온릉지 2권을 영조에게 올렸다. 병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에 이르렀다.

1789년(정조 14년) 가선대부 예조참판(贈 嘉善大夫 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의금부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성균관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으로 추증 되었다.

관련 항목

참고 자료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 영조실록
  • 성호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