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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 명칭 ==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ccp.go.kr/book/book_etc_view.jsp?id=54 가야문화재연구소 개정판 한국의 고대목간_안압지]</ref>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ccp.go.kr/book/book_etc_view.jsp?id=54 가야문화재연구소 개정판 한국의 고대목간_안압지]{{깨진 링크|url=http://www.ccp.go.kr/book/book_etc_view.jsp?id=54 }}</ref>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경주 월성|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경주 월성|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2018년 8월 23일 (목) 19:58 판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과 月池)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보물
종목보물 제18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177,172m2
시대통일신라
소유국유, 공유
위치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6
좌표북위 35° 49′ 57.52″ 동경 129° 13′ 8.26″ / 북위 35.8326444° 동경 129.2189611°  / 35.8326444; 129.2189611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경주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는 경주시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이다.

개요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조성되었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이다.

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고, 연못 안에는 3개의 성(섬)이 있다. 별궁인 임해전과 여러 부속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곳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던 곳이다.

복원및논란

안압지의 세 전각이 우선 복원된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고, 덕분에 햇빛이 비치는 날은 건물이 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버젓이 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기와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의 경우에도 논란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조선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입혀놨기 때문. 다만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록하단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는 상황.

명칭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1]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같이 보기

각주

  1. 가야문화재연구소 개정판 한국의 고대목간_안압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안압지"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