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율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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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에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 (현 [[불로동]] 163번지)에서 태어났다.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1914년]]에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 (현 [[불로동]] 163번지)에서 태어났다.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전주신흥고등학교|신흥학교]]에 입학을 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2266814 중국의 "악성"-정율성은 한국인], 중앙일보, 1988년 8월 13일. 정율성은 1929년에 5년제 [[전주신흥고등학교|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였으며, 4학년 1학기인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ref> <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75606.html '중국 혁명음악 대부' 정율성 선생 '모교' 전주신흥중에서 명예졸업장], 한겨레신문, 2008년 3월 13일. 2008년 3월에 전주신흥중학교가 정율성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ref> 이후 [[1933년]] [[중국]] [[난징]] 도착하고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에 머물던 시기에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전주신흥고등학교|신흥학교]]에 입학을 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2266814 중국의 "악성"-정율성은 한국인], 중앙일보, 1988년 8월 13일. 정율성은 1929년에 5년제 [[전주신흥고등학교|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였으며, 4학년 1학기인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ref> <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75606.html '중국 혁명음악 대부' 정율성 선생 '모교' 전주신흥중에서 명예졸업장], 한겨레신문, 2008년 3월 13일. 2008년 3월에 전주신흥중학교가 정율성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ref>
[[1933년]]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에 머물던 시기에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1936년]]에 그는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1939년]]에 [[중국 공산당]]의 가입과 동시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1936년]]에 그는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1939년]]에 [[중국 공산당]]의 가입과 동시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2018년 5월 19일 (토) 03:37 판

정율성(중국어 간체자: 郑律成, 정체자: 鄭律成, 병음: Zhèng Lǜchéng 정뤼청[*], 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출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곡가로 본명은 정부은(鄭富恩)이다.

생애

파일:「音楽家鄭律成先生誕生地」 碑.jpg
정율성 선생 탄생지비(광주 동구 불로동)

1914년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94번지 (현 불로동 163번지)에서 태어났다. 1917년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하였다.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신흥학교에 입학을 했다.[1] [2]

1933년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에 머물던 시기에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등을 공부했다.

1936년에 그는 처녀작 《오월의 노래》(五月之歌)를 작곡했으며, 1939년중국 공산당의 가입과 동시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194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 구락부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조선해방 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등을 작곡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저우언라이의 요구로 김일성은 정률성을 중국으로 파견했고, 중국에 입국한 그는 음악 활동에 몰두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했다.

1976년 12월 7일베이징에서 사망하였고 바바오산 혁명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작품

  • 옌안송
  • 팔로군행진곡
  • 연수요
  • 싱안링에 눈이 내리네
  • 십륙자령 3곡
  • 오페라 <망부운>
  • 벌목요
  • 생산요
  • 강대한 함대 바다에서 행진한다
  • 우리는 행복해요
  • 초록빛 조국
  • 소산에 이르러
  • 매화를 읊노라
  • 장정
  • 진아를 기다리며
  • 청평악-육반산
  • 물길에 내 마음 싣고
  • 심원춘-장사
  • 포정함대 출동했다
  • 광창길에서
  • 매령3장
  • 우리는 행복해요
  • 중조우의 <中朝友誼>

같이 보기

각주

  1. 중국의 "악성"-정율성은 한국인, 중앙일보, 1988년 8월 13일. 정율성은 1929년에 5년제 전주신흥학교에 입학하였으며, 4학년 1학기인 1933년 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2. '중국 혁명음악 대부' 정율성 선생 '모교' 전주신흥중에서 명예졸업장, 한겨레신문, 2008년 3월 13일. 2008년 3월에 전주신흥중학교가 정율성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