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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


조예가 태어나자 [[조조]](曹操)는 조예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곁에 있도록 명령했다. 위서에 따르면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동진의 역사가 손성도 조예는 타고난 용모가 뛰어났으며 바닥에 닿을 정도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조예는 220년, 15세의 나이로 무덕후에 봉해졌고, 이듬해에는 제공, 황초 3년(222년)에는 평원왕이 되었다.
위서에 따르면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서진의 역사가 손성도 조예는 타고난 용모가 뛰어났으며 바닥에 닿을 정도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어렸을 때 총명함으로 조부 [[조조]](曹操)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아버지 [[조비]]에게는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유년 시절에 모후 견부인이 [[조비]]에게 사사당하는 일을 겪었고, [[조비]]는 더더욱 조예를 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죽인 뒤 아들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라 시키자 조예가 울며 말했다. "폐하는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나 신은 도저히 어린 사슴을 죽일 수 없습니다." [[조비]]는 그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활을 버렸고 이 일로 황태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ref name="사마광">사마광, 《자치통감 삼국지》, 신동준 역, 살림출판사, 2004</ref>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조예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조정대신과 교류하거나 정사를 묻는 일 없이 오로지 책만 읽었다.<ref name="사마광"/> 즉위 초에는 학문에 힘쓰며 직접 통치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정치에 나섰다.


221년, 아버지 조비가 어머니 견씨를 살해하였다. 처음에 조비는 조예를 좋아하지 않고 다른 부인 (徐姫)의 아이 조례( 曹礼 ) 태자로 세우려 했으므로 조예는 장기간 태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죽인 뒤 아들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라 시키자 조예가 울며 말했다. "폐하는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나 신은 도저히 어린 사슴을 죽일 수 없습니다." [[조비]]는 그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활을 버렸고 이 일로 황태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ref name="사마광">사마광, 《자치통감 삼국지》, 신동준 역, 살림출판사, 2004</ref>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같은 5 문제 (文帝)가 승하하자 황제에 즉위했다.<ref name="사마광"/> 어머니인 견씨가 아버지인 조비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에, 즉위 이전의 조예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독서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황제에 처음 즉위했을때 조예의 풍모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우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조부 조조와 아버지 조비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베품으로써 앞서 조비 시기 때 처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촉한]]이 [[오 (삼국)|오]]와 연합하여 위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사마의]] 등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친히 전투에 참가하는 등 위나라를 존망 위기에서 구해내어 명군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마의에게 절대 병권을 맡기지 말고 주변에 두고 감시하며 참모로만 쓰라는 조조의 유언을 무시한 사마의의 장군으로의 등용이, 조예 사후 사마의가 정권을 찬탈할 힘을 쌓을 기회를 준 측면도 있다.


조예는 즉위 후 가장 먼저 어머니 견씨의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도록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하였고, 235년에는 어머니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문덕황후 (조위)|문덕황후]]를 사사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궁을 새로 짓고 사치로운 생활을 하는 등 민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많이 하였는데 [[235년]] 허도에 큰 공사를 일으켜 궁전을 짓고 [[낙양]]에도 조양전과 태극전을 짓고 총장관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10길에 달했고 숭화전과 청소각, 봉황루 등을 세우고 구룡지를 만들어 박사 [[마균]]에게 총감독을 맡겼다.


경초 원년 (237년)에는 칠묘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할아버지 조조와 아버지 조비에게 태조와 고조의 묘호를 정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묘호를 열조로 정하고 생모인 문소황후의 영묘를 별도로 세웠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궁전의 대들보와 기둥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푸른 기와와 금빛 벽돌을 사용하며 이름난 명장 3만 명이 동원되고 백성 30만 명이 부역으로 끌려와 일했다. 이에 사도 [[동심]]이 표문을 올리지만 거절당하고 곧 태자사인 [[장무 (위)|장무]]가 표문을 올리지만 조예의 분노로 처형당하며 소부 [[양부]]의 표문도 거절당한다.


이 해 조예의 총애는 황후 모씨에서 부인 곽씨로 옮겨갔다. 조예는 모씨를 빼놓고 연회를 열고 이를 함구토록 했는데 모황후가 이를 알게 되었다. 모황후가 조예를 비꼬자 비밀이 새어나갔음을 알게 된 조예는 주위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모황후에게도 죽음을 하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 견부인을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하고 그녀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문덕황후 (조위)|문덕황후]]를 사사한 후 목을 베어 효수하기도 하였다. [[239년]]에 조예는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그의 사후, 어린 양자인 제왕(齊王) [[조방]](曹芳)이 황위를 계승하였고, 이때 조씨 일파가 사마씨에게 패하고 말았다. 실권은 사마씨가 장악하게 되고, [[서진]](晉)왕조의 성립을 초래하게 된다.

경초 2 년 (238 년) 요동 제압을 완료한 후 수도 낙양에 있던 조예는 병상에 있어 조방의 후견인을 누구로 할지를 모색했다. 처음에 조예는 연왕 조우, 하후헌, 조조(조휴의 아들), 진랑,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과 손자가 조우, 진랑,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

결국 조상과 사마의를 후견인으로 다시 세우고 239년 1월, 36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고평릉에 묻혔다.


== 조예의 출생에 대하여 ==
== 조예의 출생에 대하여 ==

2018년 5월 3일 (목) 13:25 판

조위 열조 명황제 조예(曹魏 烈祖 明皇帝 曹叡, 205년 ~ 239년 음력 1월 1일)는 위나라(魏)의 초대 황제인 세조 문황제(世祖 文皇帝) 조비(曹丕)의 장남이며, 위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는 원중(元仲). 어머니는 원희(袁熙)의 처였던 문소황후 견씨(甄氏)이며 중국의 역대 황제 중 나라를 세우지 않고 조(祖) 자의 묘호를 얻은 최초의 황제이다.

생애

조예가 태어나자 조조(曹操)는 조예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곁에 있도록 명령했다. 위서에 따르면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동진의 역사가 손성도 조예는 타고난 용모가 뛰어났으며 바닥에 닿을 정도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조예는 220년, 15세의 나이로 무덕후에 봉해졌고, 이듬해에는 제공, 황초 3년(222년)에는 평원왕이 되었다.

221년, 아버지 조비가 어머니 견씨를 살해하였다. 처음에 조비는 조예를 좋아하지 않고 다른 부인 (徐姫)의 아이 조례( 曹礼 )를 태자로 세우려 했으므로 조예는 장기간 태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죽인 뒤 아들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라 시키자 조예가 울며 말했다. "폐하는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나 신은 도저히 어린 사슴을 죽일 수 없습니다." 조비는 그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활을 버렸고 이 일로 황태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1]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같은 해 5 월 문제 (文帝)가 승하하자 황제에 즉위했다.[1] 어머니인 견씨가 아버지인 조비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에, 즉위 이전의 조예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오로지 독서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황제에 처음 즉위했을때 조예의 풍모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예는 즉위 후 가장 먼저 어머니 견씨의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도록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하였고, 235년에는 어머니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문덕황후를 사사하였다.

경초 원년 (237년)에는 칠묘의 제도를 정비하였다. 할아버지 조조와 아버지 조비에게 태조와 고조의 묘호를 정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묘호를 열조로 정하고 생모인 문소황후의 영묘를 별도로 세웠다.

이 해 조예의 총애는 황후 모씨에서 부인 곽씨로 옮겨갔다. 조예는 모씨를 빼놓고 연회를 열고 이를 함구토록 했는데 모황후가 이를 알게 되었다. 모황후가 조예를 비꼬자 비밀이 새어나갔음을 알게 된 조예는 주위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모황후에게도 죽음을 하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

경초 2 년 (238 년) 요동 제압을 완료한 후 수도 낙양에 있던 조예는 병상에 있어 조방의 후견인을 누구로 할지를 모색했다. 처음에 조예는 연왕 조우, 하후헌, 조조(조휴의 아들), 진랑, 조상과 함께 조방을 보정하게 하려고 했으나, 진랑 등과 사이가 나쁜 유방과 손자가 조우, 진랑, 조조를 헐뜯고 조상과 사마의를 추천했다.

결국 조상과 사마의를 후견인으로 다시 세우고 239년 1월, 36세의 나이로 붕어하여 고평릉에 묻혔다.

조예의 출생에 대하여

조예의 출생에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삼국지」위서 명제기에는 조예가 경초 3년 (239 년)에 36세의 나이로 승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산하면 조예의 생년은 건안 9 년 (204 년)이 된다. 반면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조예는 건안 10년 (205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36세는 잘못된 계산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 대해「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조비가 견씨를 사사하고 조예가 조비에게 특히 냉대 된 것을 증거로 들어, 조예의 친아버지는 조비가 아니라 견씨의 전 남편 원희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조조가 기주를 공략, 조비가 원희의 아내였던 견씨를 약탈한 시점(204년)에 조예는 원희의 자식으로 이미 세상에 태어나 있으며, 조비는 그 아이를 (푸대접 하면서도) 양육했다고 한다. 노필의 이론이 맞다면 조비가 견씨를 사사한 이유는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기 때문이고 조예가 조비에게 푸대접 받은 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정통성을 중시한 그 당시에 조비가 원희의 아들인 조예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웠을 리가 없다는 점 등이 있다.

각주

  1. 사마광, 《자치통감 삼국지》, 신동준 역, 살림출판사, 2004
전임
문제 조비
제2대 조위 황제
226년 ~ 239년
후임
조방
전임
조위 문제
중국 황제
(촉한 - 유선)
( - 손권)
226년 ~ 239년
후임
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