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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楊規, ? ~ [[1011년]] [[3월 5일]]([[음력 1월 28일]]))는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했다.
'''양규'''(楊規, 미상 ~ [[1011년]] [[3월 5일]]([[음력 1월 28일]]<ref>『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 1월 28일(임인)</ref>))는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했다.


[[1010년]] [[고려-요 전쟁|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은 [[통주]]를 공격하여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양규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냈으나 "우리는 왕의 명령으로 싸우지 강조의 명령으로 싸운게 아니다"하며 지켰다.
[[1010년]] [[고려-요 전쟁|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은 [[통주]]를 공격하여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양규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냈으나 "우리는 왕의 명령으로 싸우지 강조의 명령으로 싸운게 아니다"하며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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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 자료 ==
== 전기 자료 ==
* 『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 『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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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고려의 무신]]
[[분류:고려의 무신]]
[[분류:1011년 죽음]]
[[분류:1011년 죽음]]

2018년 4월 20일 (금) 23:15 판

양규(楊規, 미상 ~ 1011년 3월 5일(음력 1월 28일[1]))는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했다.

1010년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은 통주를 공격하여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양규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냈으나 "우리는 왕의 명령으로 싸우지 강조의 명령으로 싸운게 아니다"하며 지켰다.

그 후 곽주로가 군사 700명을 이끌고 강조의 부하를 구했으며 거란군 6000명을 공격해 성을 탈환하고 백성 7000명을 데리고 통주로 갔고 수도 개경이 거란에 의해 함락되고 왕 현종나주까지 피란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1011년 봄 거란군이 철병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

여리참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명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

애전에서 김숙흥과 함께 거란 성종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항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

양규가 등장한 작품

전기 자료

  • 『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각주

  1.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 1월 28일(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