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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31일 (토) 16:50 판

성녕대군
誠寧大君
대군(大君)
이름
이종
李褈
신상정보
출생일 1405년 8월 3일(1405-08-03)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418년 3월 11일(1418-03-11)(12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대군 사저에서 홍역으로 병사
부친 태종 이방원
모친 원경왕후 민씨
배우자 삼한국대부인 창녕 성씨
자녀 안평대군 이용(양장자)
원천군 이의(양차자)
기타 친인척 태조 이단(할아버지)
정종 이경(큰아버지)
성억(장인)
정순공주(동복 누나)
경정공주(동복 누나)
양녕대군(동복 형)
경녕군(이복 형)
효령대군(동복 형)
세종대왕(동복 형)
함녕군(이복 형)
온녕군(이복 남동생)
근녕군(이복 남동생)
종교 유교(성리학)

성녕대군 이종(誠寧大君 李褈, 1405년 8월 3일(음력 7월 9일) ~ 1418년 3월 11일(음력 2월 4일))은 조선 태종 임금의 제4적자로 이름은 이종(李褈), 본관전주(全州)이다.

생애

태종원경왕후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적자)로, 39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태종과 원경왕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자랐다. 1411년 성녕군(誠寧君)에 책봉되었고 1414년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진봉되었다. 우애가 깊고, 학문에도 뜻이 있었으나, 1418년(태종 18) 음력 2월 4일홍역에 걸려 14살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부인은 성억의 딸이다. 후에 셋째형인 세종(충녕대군)이 즉위한후,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양자로 들어 왔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그 해 10월 19일 안평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멸문당하고 대군의 부인 성씨 또한 그해 10월 22일 경상도 경주로 귀양가 폐출(廢黜, 지위나 작위, 관직을 몰수하고 내침)되었다.

1459년(세조 4)에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를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종손이 일곱 번이나 끊겼다. 훗날 이러한 사태를 딱하게 여긴 고종이 입직강관이었던 이승보에게 명하여 대군의 후손을 찾게 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입직강관 이승보의 농간으로 인하여 고종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가세가 계속 기울어 고양시 대자동에서 충청도 음성으로 하향까지 하였다. 이후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사후 양가 후손(死後 養家 後孫)들이 주경야독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대군의 16대손에 이르러 종손가에 여유로운 훈풍이 불면서 종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1]

가족 관계

관련 작품

TV 시리즈

기타

성녕대군 사후 양가 종손(誠寧大君 死後 養家 從孫)

앞서 거론한 것처럼 성녕대군의 후손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이복 형이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 성녕대군 직계 가통에 출계된 것이며 특히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종회에서는 성녕대군의 양가 종손(養家 從孫)을 같은 종손(從孫)으로 예우하고 있다.

함께 보기

각주

  1.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성녕대군파(태종대왕 제3남) 약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