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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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l Cid-estatua-(Parque de Balboa).jpg|thumb|로드리고 디아즈 비바르의 동상]]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íaz de Vivar, [[1040년]] [[부르고스]] 근처 [[비바르]] - [[1099년]] [[7월 10일]], [[발렌시아]]), 또는 '''엘 시드 캄페아도르'''(El Cid Campeador)로 알려진 그는 [[카스티야]] 귀족이자 장군 및 외교관이었으며, 후에 [[발렌시아]]에 망명하여 정복하고 통치하였다.
 
'''엘 시드'''라는 이름은 [[스페인]]의 관사인 엘(El), 그리고 [[아랍 연맹|아랍]] 방언 단어 سيد 시디 또는 sayyid는 '경(Lord)'이라는 뜻이다. 'Campeador'라는 명칭은 'campidoctor'에서 왔으며, 중세 [[라틴어]]로 개략적인 의미는 '투사(鬪士)'를 의미한다. 따라서 '엘 시드 캄페아도르'를 번역하자면 ''투사 영주님''이라는 뜻으로 그는 [[에스파냐|스페인]]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된다.
== 생애 ==
=== 초기 ===
로드리고 디아스의 아버지인 [[디에고 라이네스]]는 [[카스티야]]의 소귀족(infanzones)이었다. 그러나 엘 시드의 사회적 배경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후세의 전승과는 달리 그는 유복하게 자랐다.
 
그의 외가는 넓은 땅을 가진 귀족 집안이었으며 그는 [[페르난도 1세]]의 궁정에서 나중에 카스티야 왕 [[산초 2세 (카스티야)|산초 2세]]로 즉위한 왕자와 함께 자랐다. 산초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1065) 후 22세의 엘 시드를 국왕군 지휘관인 [[국왕 기수]](armiger regis)로 임명했다.
 
엘 시드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 중요한 지위에 오른 것은 이때부터 이미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음을 나타낸다. 1067년 그는 산초를 수행하며 [[무어인]]들의 [[사라고사 왕국]] 원정을 떠났고, 사라고사 왕국과의 협상을 주도해 이 왕국을 카스티야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페르난도 1세는 죽을 때 여러 자식들에게 왕국을 나누어주면서 둘째 아들 [[알폰소 6세 (레온과 카스티야)|알폰소 6세]]에게 [[레온 주 (니키라과)|레온]]을 물려 주었다. 산초는 레온을 합병하기 위해 [[1067년]] 동생 알폰소 6세와 전쟁을 시작했고 후세의 전설은 엘 시드가 마지못해 산초의 공격을 지지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그런 일을 망설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산초의 레온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알폰소는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 원정에서 뛰어난 역할을 한 엘 시드는 산초가 후사 없이 [[1072년]] 사모라를 공격하다 전사하고 알폰소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엘 시드는 국왕 기수의 지위를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엘 시드는 이 사람과 철천지 원수가 되었음)이라는 유력자에게 빼앗겼고 궁정에서 누렸던 영향력도 자연히 줄어들었지만, 계속 궁정에 남아 있을 수는 있었다.
 
[[1074년]] 7월 그는 아마도 알폰소의 권유로, 왕의 조카딸이자 [[오비에도 백작]]의 딸인 [[히메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는 레온의 옛 왕가와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 히메나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다. 아들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쳐들어온 이슬람교도 알모라비데인들과 싸우다가 [[콘수에그라 전투]](1097)에서 전사했다.
 
히메나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엘 시드의 궁정 내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레온 군주인 알폰소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카스티야 사람들은 엘 시드를 진정한 지도자로 여겼던 것 같다. 게다가 그는 대지주 귀족들이 알폰소 6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불만을 느꼈다.
 
엘 시드를 영웅으로 묘사한 전기들은 그를 뻔뻔한 귀족들과 중상 모략에 눈먼 알폰소의 무고한 희생물로 묘사했지만, 엘 시드의 유력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아마 그의 몰락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나중에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기민하고 빈틈없는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궁정에 대한 그의 태도는 산초의 죽음으로 영향력을 잃은 데 대한 원한 때문에 잠시 자제력을 잃었던 것 같다.
 
[[1079년]] [[세비야]]를 지배하던 무어인 왕에게 사절로 가 있던 그는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와 불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오르도녜스는 그라나다 왕의 세비야 침략을 지원하고 있었다. 엘 시드는 세비야 근처의 카브라에서 훨씬 우세한 [[그라나다]]군을 격파하고 가르시아 오르도녜스를 사로잡았다.
 
이 승리가 그에게는 몰락의 첫걸음이었는데 1081년 그가 알폰소의 보호를 받고 있던 무어인의 왕국 [[톨레도]]를 무단으로 공격하자 알폰소 왕은 엘 시드를 카스티야에서 추방했다. 그 후 여러 차례 화해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성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081년 이래 엘 시드는 두번 다시 장기간 알폰소의 영토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 이슬람 교도에 대한 봉사 ===
추방당한 엘 시드는 이제 이슬람 왕조가 다스리던 [[사라고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가 사라고사의 이슬람 왕조와 처음 접촉한 것은 1065년이었다.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사라고사의 왕 [[알 무타민]]은 허약한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유명한 기독교 전사 엘 시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엘 시드는 알 무타민과 후계자인 [[알 무스타인 2세]]를 거의 10년 동안 충성스럽게 받들었다. 그는 경험을 통해 스페인 아랍 국가들의 복잡한 정치와 이슬람 율법 및 관습을 터득했는데, 이는 나중에 그가 [[발렌시아]]를 정복하고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그는 패배를 모르는 장군으로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갔다.
 
[[1082년]] 엘 시드는 알 무타민을 위해 레리다의 무어인 왕과 그의 동맹군인 기독교 군대를 격파했고 이 기독교 군대에는 [[바르셀로나]] 백작도 끼어 있었다. 1084년에는 [[아라곤 왕국|아라곤]] 왕 [[산초 라미레스]]가 이끄는 대규모 기독교 군대를 무찔렀으며 이런 승리에 고마움을 느낀 무어인 군주들은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1086년 북아프리카의 [[무라비트 왕조]]가 대규모로 스페인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 사그라하스에서 참패를 당한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에 대한 적개심을 억누르고, 기독교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군인 엘 시드를 망명지로부터 불러들였다.
 
엘 시드가 [[1087년]] 7월에 알폰소의 궁정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직후에 그는 다시 사라고사로 돌아갔고, 그 후 스페인 내 기독교 왕국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무라비트 왕조와의 전투가 여러 전략 요충지에서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엘 시드는 어느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엘 시드는 이제 부유한 무어 왕국인 발렌시아를 차지하기 위한 복잡하고 장기적인 정치적 책략에 착수했다.
 
=== 발렌시아 정복 ===
그의 첫 번째 조치는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 백작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1090년]] 5월 [[베렝게르 라몬 2세]]를 테루엘 근처의 테바르에서 참패시킴으로써 이 목적은 이루어졌다.
 
그 후 몇 년 동안 엘 시드는 발렌시아와, 이제 자기에게 공물을 바치게 된 발렌시아 통치자 [[알 카디르]]에 대한 지배력을 조금씩 강화했다. [[1092년]] 10월 카디(최고 행정관)인 [[이븐 야하프]]가 무라비트 왕조의 정치적 지원 아래 반란을 일으켜 알 카디르 왕을 살해했을 때, 엘 시드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엘 시드는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물샐틈없이 포위해 몇 달에 걸친 공격을 퍼부었고 [[1093년]] 12월 포위를 돌파하려는 무라비트측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1094년]] 5월 이븐 야하프는 항복했고 엘 시드는 마침내 정복자로서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지배권을 쉽게 빼앗기 위해 우선 이븐 야하프와 협정을 맺었고 이븐 야하프는 반란과 국왕 시해가 용서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협정의 목적이 달성되자 엘 시드는 이븐 야하프를 체포해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엘 시드는 이제 기독교도만이 아니라 이슬람 교도들의 최고 행정관으로 행세하면서 발렌시아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알폰소 6세를 대신해서 발렌시아를 차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으로 발렌시아를 다스리는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은 [[1096년]]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프랑스인 주교 제롬이 새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상당수의 기독교도 이주자들이 발렌시아로 들어왔다. 엘 시드는 맏딸 크리스티나를 [[아라곤 왕국]]의 왕자이며 몬손의 영주인 라미로와 결혼시키고, 둘째 딸 마리아를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와 결혼시켜 군주로서의 지위를 과시했다.
* [[레콩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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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유럽의 중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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