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티노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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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년 12월 17일 프랑스 사람인 새 교황 [[교황 우르바노 4세|우르바노 4세]]는 프랑스 상서국장 시몽을 산 체칠리아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 그래서 시몽은 로마에 와서 살아야 했지만, 우르바노 4세는 루이 9세와 그의 동생 앙주의 샤를을 상대하기 위한 고위직을 대리인으로 프랑스에 파견해야 했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경력은 시몽이 교황의 대리인으로 일하기에 충분했다.
1261년 12월 17일 프랑스 사람인 새 교황 [[교황 우르바노 4세|우르바노 4세]]는 프랑스 상서국장 시몽을 산 체칠리아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 그래서 시몽은 로마에 와서 살아야 했지만, 우르바노 4세는 루이 9세와 그의 동생 앙주의 샤를을 상대하기 위한 고위직을 대리인으로 프랑스에 파견해야 했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경력은 시몽이 교황의 대리인으로 일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시몽 추기경은 우르바노 4세에 의해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으며, 우르바노 4세의 후임인 [[교황 클레멘스 4세]] 때도 마찬가지였다.<ref>우르바노 4세 및 클레멘스 4세와 시몽 추기경 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Edmund Martène and Ursine Durand, ''Thesaurus novus anecdotorum'' Tomus Secundus (Paris 1717), 1-636.</ref>
그리하여 시몽 추기경은 우르바노 4세에 의해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으며, 우르바노 4세의 후임인 [[교황 클레멘스 4세]] 때도 마찬가지였다.<ref>우르바노 4세 및 클레멘스 4세와 시몽 추기경 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Edmund Martène and Ursine Durand, ''Thesaurus novus anecdotorum'' Tomus Secundus (Paris 1717), 1-636.</ref> 1264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날, 시몽은 파리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ref>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 219.</ref> 그는 1274년 8월 1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재차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1279년까지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그가 부여받은 첫 번째 임무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만프레디]]에 맞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과 지원군을 모집하는 것이었다.<ref>Martene and Durand, p. 114, Epistle 32.</ref> 그는 곧 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의 왕으로 만들기 위한 교황의 지원 협상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특사로서 그는 개혁을 위한 시노드를 몇 차례 주재하고 그레고리오 교황의 십자군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 중 가장 중요힌 시노드는 1276년 9월 13일 [[부르주]]에서 열린 시노드였다.<ref>Lorenzo Cardella, ''Memorie storiche de' Cardinali della Santa Romana chiesa'' I. 2 (Roma 1792), p. 304; Adolphe-Charles Peltier, ''Dictionnaire universel des conciles'' I (Paris 1847), 358. Carl Joseph von Hefele, ''Conciliengeschichte nach dem Quellen bearbeitet'' second edition Volume VI (Freiburg im Breisgau: Herder 1890) 176-177.</ref>


[[1260년]]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상서국장을 지낸 후 이듬해 [[추기경]]이 되어 프랑스 교황 사절로 임명받아 루이 9세의 동생 [[나폴리의 카를로 1세|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였다. [[1281년]] 교황이 된 후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으나 로마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그곳에 거처를 정하였다.
[[1260년]]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상서국장을 지낸 후 이듬해 [[추기경]]이 되어 프랑스 교황 사절로 임명받아 루이 9세의 동생 [[나폴리의 카를로 1세|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의 군주|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였다. [[1281년]] 교황이 된 후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으나 로마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그곳에 거처를 정하였다.

2017년 9월 27일 (수) 16:14 판

마르티노 4세
전임자니콜라오 3세
후임자호노리오 4세

교황 마르티노 4세(라틴어: Martin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Martino IV)는 제189대 교황(재위: 1281년 2월 22일 - 1285년 3월 28일)이다. 본명은 시몽 드 브리옹(프랑스어: Simon de Brion)이다.

유년 생활

시몽 드 브리옹은 장 드 브리옹의 아들로 1210년경 프랑스의 일드프랑스에서 태어났다.[1] 그의 형제 질로는 사스 교구의 기사였다.[2] 봉건 영주 집안이었던 브리옹 가문의 명칭은 쥬와늬 인근에 있는 브리옹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리 대학교 출신으로 파도바볼로냐로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1238년 교황의 호의에 힘입어 생캉탱의 의전참사회원이 되었으며, 1248년에서 1259년까지는 루앙 대성당의 의전참사회원을 지내다가 나중에 수석부제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투르에 있는 생마르탱 성당의 회계원으로 임명되어,[3] 1281년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지냈다. 1255-1259년, 루이 9세는 롱샹에 클라라회 수녀원을 세우고, 여동생 이자벨 공주를 후견인으로, 시몽 드 브리옹을 보호자로 임명했다. 1260년 시몽 드 브리옹은 루이 9세의 측근으로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상서국장으로 등용되었다.[4]

추기경

1261년 12월 17일 프랑스 사람인 새 교황 우르바노 4세는 프랑스 상서국장 시몽을 산 체칠리아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 그래서 시몽은 로마에 와서 살아야 했지만, 우르바노 4세는 루이 9세와 그의 동생 앙주의 샤를을 상대하기 위한 고위직을 대리인으로 프랑스에 파견해야 했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경력은 시몽이 교황의 대리인으로 일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시몽 추기경은 우르바노 4세에 의해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으며, 우르바노 4세의 후임인 교황 클레멘스 4세 때도 마찬가지였다.[5] 1264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날, 시몽은 파리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6] 그는 1274년 8월 1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재차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1279년까지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그가 부여받은 첫 번째 임무는 호엔슈타우펜 왕가만프레디에 맞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과 지원군을 모집하는 것이었다.[7] 그는 곧 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의 왕으로 만들기 위한 교황의 지원 협상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다. 특사로서 그는 개혁을 위한 시노드를 몇 차례 주재하고 그레고리오 교황의 십자군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 중 가장 중요힌 시노드는 1276년 9월 13일 부르주에서 열린 시노드였다.[8]

1260년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상서국장을 지낸 후 이듬해 추기경이 되어 프랑스 교황 사절로 임명받아 루이 9세의 동생 앙주의 샤를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였다. 1281년 교황이 된 후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으나 로마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그곳에 거처를 정하였다.

한편 교황은 샤를의 지위를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강화시켜 로마의 원로원이 되게 하고 그의 동방 계획을 지지하였다. 1281년 교황은 동서 교회의 일치를 방해한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파문하고 이어서 프랑스를 위해 시칠리아를 구하려고 노력한 아라곤의 페드로 3세도 파문하였다. 교황은 수도회들을 좋아하여, 특히 프란치스코회에는 칙서를 내려 그들의 설교와 고해성사권을 부여하고 가난에 관한 규율을 완화시켰다.

주석

  1. Nikolaus Backes, Kardinal Simon de Brion (Breslau) 1910, used by H.K. Mann and J. Hollnsteiner, The Lives of the Popes in the Middle Ages XVI (London) 1932: 171–205., both quoted by Kay, Richard (1965). “Martin IV and the Fugitive Bishop of Bayeux”. 《Speculum》 40 (3): 460–483 [p. 461f.] doi:10.2307/2850920. JSTOR 2850920. 
  2. 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 220.
  3. 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p. 218-219.
  4. F. Duchesne, Histoire des chanceliers et gardes des sceaux de France (Paris 1680), 234-236.
  5. 우르바노 4세 및 클레멘스 4세와 시몽 추기경 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Edmund Martène and Ursine Durand, Thesaurus novus anecdotorum Tomus Secundus (Paris 1717), 1-636.
  6. 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 219.
  7. Martene and Durand, p. 114, Epistle 32.
  8. Lorenzo Cardella, Memorie storiche de' Cardinali della Santa Romana chiesa I. 2 (Roma 1792), p. 304; Adolphe-Charles Peltier, Dictionnaire universel des conciles I (Paris 1847), 358. Carl Joseph von Hefele, Conciliengeschichte nach dem Quellen bearbeitet second edition Volume VI (Freiburg im Breisgau: Herder 1890) 176-177.
전임
니콜라오 3세
제189대 교황
1281년 2월 22일 - 1285년 3월 28일
후임
호노리오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