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토 뤼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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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직을 사임한 뒤 뤼티는 핀란드 국립은행 총재직으로 돌아갔다. 그전까지 총재직을 맡고 있던 [[유카 랑겔]]은 기꺼이 뤼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1944년 가을, 뤼티는 10년 전 대공황 때 그랬듯 통화정책에 강경책을 사용해 물가상승을 억제하고 수출을 증대시켰다.{{sfnp|Turtola|2000|page=412}} 1945년 봄 핀란드의 [[공산주의|공산주의자]]들과 소련측이 소위 [[전쟁책임 재판 (핀란드)|전쟁책임 재판]]을 할 것을 요구해 왔다. 국민들 사이에 뤼티의 평판은 높았고, 애초에 전쟁 자체가 [[겨울전쟁]]부터 따지면 소련이 먼저 공격해 온 것이기 때문에 핀란드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전 외무장관 [[햘마르 프로코페]]가 뤼티의 변호인을 맡았다.{{sfnp|Turtola|2000|page=413}}
 
소련의 압력이 행사된 끝에 뤼티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뤼티 뿐 아니라 다른 각료 일곱 명도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뤼티의 형기가 가장 길었다. [[핀란드 헌법]]은 이런 [[소급입법금지|소급입법]]을 김지하고 있었으나 수정헌법을 발동해 가면서 억지로 통과시켰다. 이 과정에서 의회와 재판소에 소련과 영국의 심한 압력이 가해졌다.<ref >[http://www.finlex.fi/fi/viranomaiset/foka/1992/19920420 '' Kysymys sotasyyllisyystuomion purkamisesta''] A decision by the Finnish chancellor of justice. 11-27-1992. Retrieved 10-10-2007. {{언어고리언어링크|fi}}</ref> 뤼티 등 기결수들은 딱히 감옥에서 학대를 받지는 않았지만 옥중에서 뤼티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종양이 발견되어 위장의 대부분을 들어냈고, 수감 이후 첫 겨울에는 [[관절염]]에 걸렸다. 1949년, 핀란드의 다른 전쟁범죄 기결수들은 [[가석방]]되었고, 뤼티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같은 해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대통령이 뤼티를 사면시켰다.
 
사면된 뤼티는 공직으로 돌아가지 않고 회고록을 집필하려 했지만 건강 악화로 완성하지 못했다. 1952년 대학생들의 축하 행사에서 명예 휘장을 선사받았다. 정치 일선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투표는 꼬박꼬박 했다. 1956년 5월 헬싱키 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sfnp|Turtola|1994}} 그 5개월 뒤인 1956년 10월 사망했다. 장례는 대통령의 예에 따라 행해졌다.
 
소련이 망한 뒤 뤼티의 평판은 상당히 복원되었다. 핀란드 정부는 뤼티 등 전범재판 기결수들의 명예가 애초에 훼손된 적이 없기 때문에 따로 복권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다. 핀란드의 사법 관례상 형기 자체를 없던 일로 하거나 소급입법을 시키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간주되고 있다.<ref>[http://www.riksdagen.fi/triphome/bin/akxhref.sh?%7BKEY%7D=KK+656/1992 ASIAKIRJA KK 656/1992 vp]. (The answer of the Minister of Justice to the written question on the rehabilitation of the war-responsibility convicts). Retrieved 10-10-2007. {{언어고리언어링크|fi}}</ref>
 
1994년 의회 의사당 옆에 뤼티의 조각상이 제막되었다. 2004년에는 [[YLE]]에서 선정한 [[위대한 핀란드인]]에 뤼티가 1위 만네르헤임에 이어 2위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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