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첼로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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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는 시에나와 피렌체에서 공부하였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에 능숙하였다. 또한 그는 법학, 철학, 수학 교육 등도 받았다.<ref>Cardella, 225: Nella patria, in Siena, in Firenze attese allo studio delle lingue latina, greca, e italiana, e in tutte scriveva con gran facilità, ed eleganza. Non trascurò le scienze più gravi, e nella giurisprudenza, filosofia, e mattematica, fece lieti progressi.</ref> 점성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의 부친이 자기 아들의 운명을 점쳐본 결과, 그가 고위 성직자가 될 것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성직에 입문시켰다.<ref name="Priere">Valérie Pirie. ''The Triple Crown: An Account of the Papal Conclaves From the Fifteenth Century to the Present Day.'' New York: G.P. Putnam's Sons, 1936.</ref>
마르첼로는 시에나와 피렌체에서 공부하였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에 능숙하였다. 또한 그는 법학, 철학, 수학 교육 등도 받았다.<ref>Cardella, 225: Nella patria, in Siena, in Firenze attese allo studio delle lingue latina, greca, e italiana, e in tutte scriveva con gran facilità, ed eleganza. Non trascurò le scienze più gravi, e nella giurisprudenza, filosofia, e mattematica, fece lieti progressi.</ref> 점성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의 부친이 자기 아들의 운명을 점쳐본 결과, 그가 고위 성직자가 될 것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성직에 입문시켰다.<ref name="Priere">Valérie Pirie. ''The Triple Crown: An Account of the Papal Conclaves From the Fifteenth Century to the Present Day.'' New York: G.P. Putnam's Sons, 1936.</ref>


==탁덕==
==사제 서품==
마르첼로는 시에나에서 신학 공부를 한 후 새 교황의 선출을 축하하기 위한 피렌체 대표단의 일원으로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의 부친이 [[교황 클레멘스 7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 서기(Scrittore Apostolico)로 등용되었다.
마르첼로는 시에나에서 신학 공부를 한 후 새 교황의 선출을 축하하기 위한 피렌체 대표단의 일원으로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의 부친이 [[교황 클레멘스 7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 서기(Scrittore Apostolico)로 등용되었다. 그는 달력을 동기화하기 위해 천문 연구와 달력 연구에 착수했다. 1527년 그는 [[로마 약탈 (1527년)|로마 약탈]]이 일어나자 로마에서 도망쳤으나 나중에 돌아와서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훗날의 [[교황 바오로 3세]])의 집에 들어갔다. 마르첼로는 153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추기경==
1534년 파르네세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3세로 등극하자 마르첼로는 그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1534–1549) , 교황의 조카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가까운 조언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교황청 서기장(Protonotarius Apostolicus)이 되었다.<ref>Panvinio, 424.</ref> 마르첼로는 바오로 3세가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의 휴전을 촉구하기 위해 니스를 방문할 때 그를 수행했다. 이후 파르네세 추기경과 동행하여 스페인과 프랑스,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방문한 그는 휴전 조약을 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539년 바오로 3세는 마르첼로를 이탈리아 니카스트로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마르첼로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주교로 축성되지 않았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교황 대사로 봉직하는 동안, 1539년 12월 19일 바오로 3세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파르네세 추기경이 로마로 소환된 후에도 마르첼로는 계속 네덜란드에 머물렀다. 이후 10년간 마르첼로는 [[레조칼라브리아 현|레조]]와 [[구비오]]의 임시 관리 교구장을 겸하게 되었다.<ref name="CE"/> 로마에 있는 그의 집은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마르첼로 본인도 당시 주요 인문주의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ref>Cardella, 226: la di lui famiglia piena fosse di uomini dotti, scientifici, e letterati, ed egli mantenesse stretta corrispondenza con Angelo Coluzio, Costantino Lascari, ed altri uomini dotti, ed eruditi di quei tempi.</ref>


== 생애 ==
== 생애 ==

2017년 8월 19일 (토) 19:45 판

마르첼로 2세
전임자율리오 3세
후임자바오로 4세

교황 마르첼로 2세(라틴어: Marcell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Marcello II)는 제222대 교황(재위: 1555년 4월 9일[1] - 1555년 4월 30일/5월 1일)이다. 본명은 마르첼로 체르비니(이탈리아어: Marcello Cervini)이다. 현재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자신의 본명(마르첼로)을 그대로 사용한 마지막 교황이다.

유년 시절

마체라타와 로레토 인근의 작은 마을 몬테파노 태생인[2] 마르첼로는 안코나의 교황청 회계원인 리카르도 체르비니의 아들이다.[3] 그의 가족들은 토스카나 주 몬테풀치아노 출신인데, 이곳은 한때 시에나에 속해 있었다가 나중에 피렌체에 속하게 된 곳이다. 마르첼로에게는 알레산드로와 로물로라는 두 이복 형제와[4] 빈첸초 벨라르미노의 아내이자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모친인 신치아 체르비니라는 누이가 있었다.

마르첼로는 시에나와 피렌체에서 공부하였으며, 라틴어와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에 능숙하였다. 또한 그는 법학, 철학, 수학 교육 등도 받았다.[5] 점성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의 부친이 자기 아들의 운명을 점쳐본 결과, 그가 고위 성직자가 될 것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성직에 입문시켰다.[6]

사제 서품

마르첼로는 시에나에서 신학 공부를 한 후 새 교황의 선출을 축하하기 위한 피렌체 대표단의 일원으로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의 부친이 교황 클레멘스 7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 서기(Scrittore Apostolico)로 등용되었다. 그는 달력을 동기화하기 위해 천문 연구와 달력 연구에 착수했다. 1527년 그는 로마 약탈이 일어나자 로마에서 도망쳤으나 나중에 돌아와서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훗날의 교황 바오로 3세)의 집에 들어갔다. 마르첼로는 153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추기경

1534년 파르네세 추기경이 교황 바오로 3세로 등극하자 마르첼로는 그의 비서로 임명되었으며(1534–1549) , 교황의 조카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가까운 조언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교황청 서기장(Protonotarius Apostolicus)이 되었다.[7] 마르첼로는 바오로 3세가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의 휴전을 촉구하기 위해 니스를 방문할 때 그를 수행했다. 이후 파르네세 추기경과 동행하여 스페인과 프랑스,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방문한 그는 휴전 조약을 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539년 바오로 3세는 마르첼로를 이탈리아 니카스트로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마르첼로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주교로 축성되지 않았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교황 대사로 봉직하는 동안, 1539년 12월 19일 바오로 3세에 의해 예루살렘의 성십자가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파르네세 추기경이 로마로 소환된 후에도 마르첼로는 계속 네덜란드에 머물렀다. 이후 10년간 마르첼로는 레조구비오의 임시 관리 교구장을 겸하게 되었다.[3] 로마에 있는 그의 집은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마르첼로 본인도 당시 주요 인문주의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8]

생애

1501년 5월 6일 몬테풀치아노에서 출생한 마르첼로는 시에나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아버지가 시작한 달력 개정 작업을 하였다. 그는 추기경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친분을 맺어 그의 조카의 가정 교사가 되어 개인 비서가 되어 교황청의 행정에 게입하게 되었다.

1539년 8월 칼라브리아의 니카스트로 주교에 임명되고 12월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레지오 에밀리아 교구의 관리자가 되어 교회 개혁에 힘썼고 세르비티의 아우구스티누스회를 많이 지원하였다. 1540년에는 교황청 사절 알레산드로를 동행하여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신성로마제국카를 5세를 접견했다. 카를 5세의 반(反)로마 정책에 반대하여 미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교황청의 여러 외교 업무에 개입하였고 트리엔트 공의회 중에는 의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548년에는 바티칸 도서관장과 교황 바오로 3세의 교회 개혁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교황 율리오 3세 치하에서는 교회 개혁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교황의 족벌주의에 반대하여 구비오의 주교로 밀려났다. 1555년 4월 4일에 시작된 콘클라베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미움을 받아 교황이 될 희망이 없었으나 4일 뒤에는 정세가 바뀌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마르첼로 2세는 안젤로 마사렐리를 공의회의 사무 총장으로 임명하여 전임자 율리오 3세의 개혁안을 신속히 출판하게 하였다. 외교는 중립적인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예수회를 좋아하여 그 수도회 신부 중의 하나를 자신의 고해 신부로 삼기도 하였다. 마르첼로 2세는 교회 쇄신 열성이 대단하였지만 22일만에 선종하였다. 마르첼로 2세는 세례명을 교황의 이름으로 사용한 마지막 교황이었다.

출처

  1.  Chisholm, Hugh, 편집. (1911). 〈Marcellus (popes)〉. 《브리태니커 백과사전17 11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685쪽. 
  2. Lorenzo Cardella, Memorie storiche de' cardinali della Santa Romana Chiesa Tomo Quarto (Roma: Pagliarini 1793) pp. 225.
  3. Catholic Encyclopedia, Pope Marcellus II (1913)
  4. Onofrio Panvinio, "Marcellus II" in Historia B. Platina de vitis pontificum Romanorum ... ad Paulum II...annotation Onuphrius Panvini ... cui, eiusdem Onuphrius ... Pontificum vitae usque ad Pium V (Coloniae: apud: Maternum Cholinium MDLXIII) [Panvinio, "Life of Marcellus II"], 423.
  5. Cardella, 225: Nella patria, in Siena, in Firenze attese allo studio delle lingue latina, greca, e italiana, e in tutte scriveva con gran facilità, ed eleganza. Non trascurò le scienze più gravi, e nella giurisprudenza, filosofia, e mattematica, fece lieti progressi.
  6. Valérie Pirie. The Triple Crown: An Account of the Papal Conclaves From the Fifteenth Century to the Present Day. New York: G.P. Putnam's Sons, 1936.
  7. Panvinio, 424.
  8. Cardella, 226: la di lui famiglia piena fosse di uomini dotti, scientifici, e letterati, ed egli mantenesse stretta corrispondenza con Angelo Coluzio, Costantino Lascari, ed altri uomini dotti, ed eruditi di quei tempi.
전임
율리오 3세
제222대 교황
1555년 4월 9일 - 1555년 5월 1일
후임
바오로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