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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勸業會)는 연해주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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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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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를 선임하였다. 본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었으며, 연해주 주요 지역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다. [[1911년]] 12월 총회에서 회칙을 개정하여 조직을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고,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의사부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어 회무를 총괄하였다.

==규모==
권업회의 회원수는 1913년 10월 2,600명, 1914년 8,579명이었다.

==활동==
《권업신문》을 창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교민을 단결시키며, 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경과==
권업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노일전쟁에 패한 러시아 정부는 권업회가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음을 간파하고, 대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하여 1914년 강제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의 창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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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일 (화) 11:59 판

권업회(勸業會)는 연해주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개요

1911년 5월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鎔)·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 등이 주축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한 국권피탈 이후 초기의 최대 한민족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겉으로 명칭만 보면 순수한 경제활동을 위한 단체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위장으로 붙인 것이고 실제로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직

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를 선임하였다. 본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었으며, 연해주 주요 지역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다. 1911년 12월 총회에서 회칙을 개정하여 조직을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고,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의사부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어 회무를 총괄하였다.

규모

권업회의 회원수는 1913년 10월 2,600명, 1914년 8,579명이었다.

활동

《권업신문》을 창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교민을 단결시키며, 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경과

권업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노일전쟁에 패한 러시아 정부는 권업회가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음을 간파하고, 대일관계의 악화를 우려하여 1914년 강제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의 창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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