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일본 국경 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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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및 [[몽골인민공화국]]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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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일본 중립 조약]]
*[[소련-일본 중립 조약]]
2차 전쟁 <small>(1945)</small>
*소련-몽골 연합군 승리
*[[만주국]] 멸망
*한반도 분단
*일본 제국의 항복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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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5일 (토) 08:08 판

소련-일본 국경 분쟁
전간기,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Khalkhin Gol Soviet offensive 1939.jpg
할힌골 전투
날짜1932년-1939년
장소
외몽골, 만주연해주 일부, 한반도 북부
결과

1차 전쟁 (1932-1939)

교전국

소련의 기 소련

몽골 몽골 인민 공화국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만주국 만주국
지휘관

소련 게오르기 주코프
소련 바실리 블류헤르

몽골 허를러깅 처이발상

일본 우에다 겐키치
일본 우메즈 요시지로

만주국 푸이
병력

소련-몽골 연합군

  • 병사 8만 명
  • 전차 756대
  • 장갑차 385대
  • 포 779문
  • 항공기 765대

일본 제국군(만주국 포함)

  • 병사 9만 7천명

소련-일본 국경 분쟁은 소비에트 연방 및 몽골 인민 공화국 연합국과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이 국경 지방에서 충돌한 사건이다. 소련과 몽골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전쟁 이후 소련과 일본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약 5년 간 두 국가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만주국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재발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만주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까지 침공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중재 협상으로 소련군은 1945년 8월 14일 개성까지만 남하하였다. 1차전과 달리 2차 전쟁에서는 일본 제국이 완전히 패배하여 관동군의 붕괴를 초래했으며, 한반도 북부가 소련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1차 전쟁

할힌골 전투 초반에 일본군이 소련 무기를 노획한 이후 좋아하고 있다. 일본군은 초기에 소련군을 매섭게 몰아붙여 성과를 거두었다.

배경

1929년 중화민국과 소련이 충돌하였을 때 소련이 승리를 거두자, 중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일본은 이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1921년 소련의 성립을 방해하기 위해 일본이 시베리아로 출병한 이후부터 소련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것은 소련이 일본을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을 지원하면서 더욱 커지게 된다. 이후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을 수립하는데, 이는 소련에게 적잖은 영향을 기치게 딘다.

전투

1932년 만주국 설립 이후, 일본군과 소련군은 1934년까지 만주의 국경에서 약 151회 충돌했다. 이 전투는 1935년부터 1936년까지 1년간 약 150회 정도로 증가했고, 그 규모도 훨씬 커지게 되었다. 1935년 1월, 첫 무장 충돌인 할하미아오 사건이 몽골 인민 공화국과 만주국 사이에서 발생했다.[1] 몽골 인민군의 기병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만주국 군대는 손실을 입었으며 일본군 고문관도 사망했다. 1935년 12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오라호도가 사건 및 타우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전투들에서 일본군과 몽골 인민군 모두 약간의 장갑차를 썼다. 1937년 6월에는 칸차주 섬 사건이 아무르 강에서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 고속정 1대가 격침되었고, 나머지 1대도 파손되었다. 일본제국 1사단은 이후 소련군이 철수하자 이 섬을 점령했다. 1938년도에는 조선과 일본 제국, 소비에트 연방의 국경 지역인 하산의 호수에서 하산 호 전투가 발발했다. 하산은 블라디보스토크나진을 잇는 요충지로 양측 모두에게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일본은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이후 소련과 일본 사이에서는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1939년 5월 11일, 여전히 불씨로 남아 있던 할힌골 지방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이 때 소련 사단들은 일본 제국 사단들과 충돌했다. 이 때 소련 극동군은 일본제국 23보병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은 5월부터 7월까지인 1차 접전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2차 접전 때 소련군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의 주도 하에 8월 달부터 대공세를 시작했다. 소련군은 만주국 일대로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해 만주국 내에 영토를 얻을 정도로 빠르게 일본군을 격파했다. 1940년 9월 16일, 일본군은 결국 할힌골에서 후퇴했다.

결과

하산 호 전투 및 할힌골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일본은 극동 지방으로의 진출을 다시 고려해야 했다. 이 무렵 일본은 중국과 전쟁 상태에 있었고, 독일 및 이탈리아와 방공 협정을 맺어 국제적으로도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0년 일본은 소련과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은 극동 지방을 공략하는 대신, 중국 본토를 침공하였다. 1941년부터 실제로 두 국가는 전쟁을 거의 벌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일본의 경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미국 및 연합국과의 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이고, 소련의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과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일본 침공안이 협의되기 전까지 두 나라 사이에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다. 실제로 독일은 일본에게 소련 침공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할힌골 전투의 패배 이후 소련-일본 중립 조약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차 전쟁

배경

얄타 회담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회담에서 서부 연합국 측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영국미국소비에트 연방 측에 일본에 대한 공격을 요구했다. 이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한반도를 온전한 상태로 남겨 소련군이 공격에 유리하게 해달라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말했다. 이에 따라 회담 당사국들은 소련의 일본군 공격을 만주, 연해주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수행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소련은 1945년 초에 일본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일본 본토 공습

각주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