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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옛 나라 정보|나라이름= 동주|현지이름= 동주|다른표기= 東周
|존속기간_시작=[[기원전 771년]]|존속기간_끝=[[기원전 256년]]▼
|p1 = 서주|flag_p1 = |s1 = 진나라|flag_s1 = |지도_그림=China 2b.jpg
|지도_설명=동주의 지역|수도= [[낙읍]]|수도위치= |공용어=|종교= |정부형태= [[군주제]]
▲|존속기간_시작=[[기원전 771년]]
|지도자_칭호= 왕<br />건국군주<br />멸망군주
|지도자_이름= 26왕<br />[[동주 평왕|희의구]]<br />[[동주 난왕|희연]]|입법부 =
|사건 = 성립|사건날짜 = [[기원전 771년]]|사건1 = 멸망▼
|사건날짜1 = [[기원전 256년]]|인구어림년도 = 기원전 273|어림인구수 = 30,000,000
|인구어림년도1 = 기원전 230|어림인구수1 = 38,000,000}} {{중국사}}▼
▲|사건날짜 = [[기원전 771년]]
'''동주'''(東周)는 [[기원전 771년]] 서주의 유왕이 견융의 침공으로 호경이 함락되고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제후들이 평왕을 옹립하였고 평왕이 수도를 [[시안 시|호경]]에서 [[뤄양|낙읍]]으로 옮긴 이후의 [[주나라]]를 말한다. 동주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명목상으로만 남겨둔 채, 독립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때가 [[춘추 전국 시대]]이다.▼
▲|인구어림년도1 = 기원전 230
▲'''동주'''(東周)는 [[기원전 771년]] 서주의 유왕이 견융의 침공으로 호경이 함락되고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제후들이 평왕을 옹립하였고 평왕이 수도를 [[시안 시|호경]]에서 [[뤄양|낙읍]]으로 옮긴 이후의 [[주나라]]를 말한다. 동주 시대에는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화되고,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명목상으로만 남겨둔 채, 독립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 때가 [[춘추 전국 시대]]이다.
== [[정나라]]와의 전쟁 ==
정나라는 [[주 선왕|선왕]]의 동생인 정 환공으로부터 시작된 제후국으로, 이제 개국한 동주 왕실과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환공은 유왕의 재상이었으며, [[주 평왕|평왕]]은 환공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당숙인 정 무공을 [[재상]]으로 삼았다. 정나라는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이제 왕실과 혈연관계가 약해진 다른 제후국과 달리 가까운 혈연관계로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으며, 왕실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 왕실을 대신해 태산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 무공은 50년에 다다른 평왕의 치세를 보좌해 동주의 초기의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왕실 내의 세력변화는 정 장공에게 좋지 않았으며, 장공은 [[노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주 왕실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노나라 내에 있는 [[태산]] 근처의 땅을 노나라에게 양도하는 대신 정나라 내에 있는 노나라 영토를 병합했다. 이것은 정나라가 주 왕실의 재상 자격으로 태산에 제사지내러 가는 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으며, 이는 환왕의 분노를 샀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환왕은 자신이 중용한 괵나라를 비롯, 진(陳), 채(蔡), [[위 (춘추 시대)|위]](衛)의 군사를 소집해 정나라를 토벌하기로 했다. 정 장공은 [[제중]](祭仲), [[고거미]](高渠彌)를 파견해 이를 맞아 싸워 대승을 거뒀다. 이때 장공의 부하 중 축첨(祝瞻)이 쏜 화살이 환왕의 팔에 맞았다. 정 장공은 공격을 중지시키며 "윗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인데 하물며 천자를 능멸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사신을 보내 환왕의 부상을 위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동주 왕실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춘추시대|춘추]][[전국 시대|전국시대]]에 관한 기록은 각각의 시대에 관한 서술을 참고하라.
== 멸망 ==
== 군주 ==
{{틀:중국 군주 (동주)}}
[[분류:주나라|*]]▼
▲[[분류:주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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