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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송나라 때 저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이었고, 그 아우도 [[소철 (사람)|소철]](蘇轍)로 유명한 문인이다.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당송8대가의 하나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22세에 과거에 급제 일찌감치 문재를 알렸다.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이를 구법당이라 하며, 구법당의 영수는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1079년]]에는 황주(호북성)으로 유배를 갔지만 낙천적인 성격으로 6년간의 유배 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한림학사]]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1094년]] 다시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혜주(광동성)으로 유배되었고 3년 후인 [[1097년]] 중국 최남단인 해남도까지 귀양을 갔다. 당시 해남도는 주민 대부분이 소수민족인 여족으로 이루어진 미개척 섬이었고 소동파는 셋째아들 소과만을 데리고 갔다. 해남도에서도 소동파는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해 주민들의 인망을 얻었고 중앙의 명을 받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해남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두막을 지어 살 수 있었다.<ref name="이나미">이나미 리츠코, 《유쾌한 에피큐리언들의 즐거운 우행》, 허명복, 가람기획, 2006, p.27~p.28</ref> 이후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남경]]에서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 작품 ==
시문집으로는 [[동파칠집]](東坡七集)이 있고, 수필집으로는
* 答謝民師論文帖
* 祭黃幾道文
* 飲湖上初晴後雨
 
그림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 행목괴석도(枯木怪石圖)
소동파의 회화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나무를 그릴 때는 먼저 네 마음 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 이는 각 개인마다 지닌 대나무를 먼저 들여다봐야한다는 뜻으로 소동파가 생각하는 회화론의 특징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소동파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현실참여주의자로서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투철했다. 게다가 그는 워낙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백성에 대한 연민의 정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관심도 유난히 깊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에서 비롯된 현실도피적 사고방식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허무성과 무가치성을 간파하고 물질세계 바깥에서 노닐려는 초월적 인생관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결과로 자연을 매우 사랑했고 나아가 그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처럼 세속적인 가치에 대하여 초연할 수 있었기에 그는 온갖 정치적 핍박 속에서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기는커녕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 생활과 지방관 생활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삶에 임할 수 있었다.
{{지만지|제목=소동파 시선|주소=http://zmanz.blogi.kr/entry/0005}}
 
== 주석각주 ==
<references/>
{{Authority 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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