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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호 납북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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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호 납치 사건'''(滄浪號拉致事件)은 [[1958년]] [[2월 16일]]에 [[대한항공]]의 전신인 [[대한국민항공사]]의 여객기가 [[경기도]] [[평택시]] 상공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항공기 납치]] 사건이다.
 
== 개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 (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음) 했다"고 거짓 발표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경찰]]은 같은달 20일 북한공작원인 김택선을 포함한 3명이 범인으로 발표하고 25일에는 기덕영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공작의 혐의로 체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월 22일 [[대한민국 국회|국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 UN군에 참가한 16개국에 대해 협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를 받은 UN군은 [[2월 24일]]의 군사정전위원회에 수석대표가 승객과 승무원,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북한에 요구하여, [[1958년]] [[3월 8일]] 납치범으로 생각되는 7명을 제외한 모든 승객과 승무원, 총 26명을 [[대한민국]]에 돌려보낸다.<ref>http://dongne.donga.com/2013/12/03/d-story%E2%85%A1-147-kna%EA%B8%B0-%EB%82%A9%EB%B6%81/</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창랑호에 탑승한 모든 인원에 대해 세뇌를 실시했으며 이에 협조적이지 않은 일부 탑승자들에게 고문을 하였다.
 
 
== 사건의 여파 ==
창랑호의 기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된 이후 반환되지 않아 대한국민항공사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골치를 썩이게 된다. 당시 대한국민항공사는 만송호, '''창랑호''', 우남호. 이렇게 3대의 항공기로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창랑호가 납북당하기 전에 이미 [[1957년]] [[7월 7일]]에 만송호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착륙하던 도중 기체가 크게 파손되어 전손처리된 상황에서 창랑호마저 납북으로 잃게 되어 우남호 하나만으로 항공사를 운영해야만 했기 때문에 적자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국민항공사는 결국 [[1959년]] [[4월 22일]]에 큰 돈을 들여 DC-3기 1대를 추가 도입하여 그날로 국내선에 투입하였고 [[1959년]] [[7월 28일]]에는 미국 록히드사에서 콘스틀레이션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 취항하여 도입 20여일만에 50명의 유학생을 태우고 태평양을 횡단, 서울 ― 시애틀간을 부정기 운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항공사는 만송호의 전손처리와 창랑호의 납북으로 인해 발생한 적자를 끝내 해소하지 못하는 바람에 [[1961년]] [[7월 16일]]에 대한국민항공사의 창업주이자 사장인 신용욱 대표가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였으며 결국 대한국민항공사는 [[1961년]] [[11월 13일]] 폐업처리 되었다.
* [[김기완 (김재권)]]
 
== 주석각주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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