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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로흐]]에서 발견된 비문 기록에 의하면, '''라가시'''는 [[수메르]]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경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도시였다.
[[텔로흐]]에서 발견된 비문 기록에 의하면, '''라가시'''는 [[수메르]]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경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도시였다.
[[우르-니나]](Ur-Nina)([[기원전 2400년]]경)와 그의 후계자들은 동쪽의 [[엘람]]인들, 북쪽의 ''켄지''(Kengi)와 [[키시]]의 왕들과 겨루었다.
[[우르-니나]](Ur-Nina)([[기원전 2400년]]경)와 그의 후계자들은 동쪽의 [[엘람]]인들, 북쪽의 ''켄지''(Kengi)와 [[키시]]의 왕들과 겨루었다.

이후에, [[솀어족]]의 정복에 의해서, 독립을 상실하고, [[아카드]]의 [[사르곤]]왕과 그 후계자들의 속국이 된다.
이후에, [[솀어족]]의 정복에 의해서, 독립을 상실하고, [[아카드]]의 [[사르곤]]왕과 그 후계자들의 속국이 된다.
그러나, 라가시는 계속해서 수메르의 문화, 예술 발전의 중심지였다. 실제로 라가시 왕조와, 그 직후의[[우르]], [[우르-구르]](Ur-Gur), [[둔기]](Dungi) 왕조 때에 수메르 문명은 예술적으로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러나, 라가시는 계속해서 수메르의 문화, 예술 발전의 중심지였다. 실제로 라가시 왕조와, 그 직후의 [[우르]], [[우르-구르]](Ur-Gur), [[둔기]](Dungi) 왕조 때에 수메르 문명은 예술적으로 최고조에 달하였다.


[[구티]]족의 압박으로 [[사르곤]]의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 '''라가시'''는 다시 한번 [[우르-바바]](Ur-baba)와 [[구데아]]의 치세하에 번성하여, 먼 지역까지 상업적 연락을 취하였다.
[[구티]]족의 압박으로 [[사르곤]]의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 '''라가시'''는 다시 한번 [[우르-바바]](Ur-baba)와 [[구데아]]의 치세하에 번성하여, 먼 지역까지 상업적 연락을 취하였다.
구데아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마누스''와 [[시리아]]의 [[레바논]] 산맥에서 삼나무를 들여왔고, 동東아라비아로부터 섬록암을, 중부와 남부 아라비아와 시나이로 부터 구리와 금을 들여왔고, 그의 군대는 동쪽의 [[엘람]]과 전투를 벌였다.
구데아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마누스''와 [[시리아]]의 [[레바논]] 산맥에서 삼나무를 들여왔고, 동東아라비아로부터 섬록암을, 중부와 남부 아라비아와 시나이로 부터 구리와 금을 들여왔고, 그의 군대는 동쪽의 [[엘람]]과 전투를 벌였다.

그의 치세는 특히 예술적 발전이 두드러졌다.
그의 치세는 특히 예술적 발전이 두드러졌다.
'''구데아'''는 [[사르곤]] 이후로 스스로를 신격화한 첫번째 지도자였다.
'''구데아'''는 [[사르곤]] 이후로 스스로를 신격화한 첫번째 지도자였다.

2008년 2월 16일 (토) 08:38 판

유프라테스 강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곳의 북서쪽에 있는 라가시(아카드어 lagaš) 또는 시르풀라(수메르어 ŠIR.BUR.LAKI; 현대의 텔 알-히바(Tell al-Hiba))는 수메르와 뒤의 바빌로니아의 옛 도시 중의 하나이다. 근처의 기르수(현대의 텔로흐(Telloh))는 라가시의 종교 중심지였다.

역사

라가시의 구데아, 텔로흐에서 발견된 섬록암 조각상, 루브르

텔로흐에서 발견된 비문 기록에 의하면, 라가시수메르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경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도시였다. 우르-니나(Ur-Nina)(기원전 2400년경)와 그의 후계자들은 동쪽의 엘람인들, 북쪽의 켄지(Kengi)와 키시의 왕들과 겨루었다.

이후에, 솀어족의 정복에 의해서, 독립을 상실하고, 아카드사르곤왕과 그 후계자들의 속국이 된다. 그러나, 라가시는 계속해서 수메르의 문화, 예술 발전의 중심지였다. 실제로 라가시 왕조와, 그 직후의 우르, 우르-구르(Ur-Gur), 둔기(Dungi) 왕조 때에 수메르 문명은 예술적으로 최고조에 달하였다.

구티족의 압박으로 사르곤의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 라가시는 다시 한번 우르-바바(Ur-baba)와 구데아의 치세하에 번성하여, 먼 지역까지 상업적 연락을 취하였다. 구데아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마누스시리아레바논 산맥에서 삼나무를 들여왔고, 동東아라비아로부터 섬록암을, 중부와 남부 아라비아와 시나이로 부터 구리와 금을 들여왔고, 그의 군대는 동쪽의 엘람과 전투를 벌였다.

그의 치세는 특히 예술적 발전이 두드러졌다. 구데아사르곤 이후로 스스로를 신격화한 첫번째 지도자였다. 수메르 여러 사원들에서 발견되는 그의 조각상들은, 이전에는 찾을 수없는 실물위주의 현실주의로 표현되어 있어 그의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구데아는 당시 예술적 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생김새를 수천년 후세에게까지 알리고자 하는 바램을 성취하였다. 당시 평민들은 스스록 조각상을 만들만한 권위를 갖지 못했다.

솀어족에 의해 정복되기 전, 우르-니나(Ur-Nina), 엔-안나-툼(En-anna-tum), 엔테메나(Entemena) 등의 시절의 일부 작품들은 아주 인상적이다. 특히 독수리 석판과, 라가시의 문장(紋章)-날개를 펼치고, 발톱으로 사자를 쥐고 있는, 사자머리 독수리-이 세겨진 거대한 은제 물병이 유명하다.

구데아왕 때 라가시의 수도는 기르수(텔로흐)였다. 왕국의 영토는 대략 1,600km²에 달하였고, 17개의 큰 도시들과, 여덟개의 지방수도, 많은 마을들(이름이 알려진 것만 40개정도 된다.)을 포함하였다.

한 추정에 의하면, 라가시기원전 2075년부터 2030년 사이에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1]

구데아 이후에, 라가시는 세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이후 그리스 왕국 카라센(Characene)에 편입되고, 그 위에 셀레우시드(Seleucid 또는 셀리우키아) 요새가 건설될 때까지는 아무런 자료를 찾을 수 없다. 텔로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까지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보물들 중에 가장 값진 것들이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