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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의 주석에 따르면, 당시 아직 능묘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릉'이 아니라 '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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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의 주석에 따르면, 당시 아직 능묘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릉'이 아니라 '두'라고 합니다.)
{{출처 필요|날짜=2010-11-10}} <!--내용 읽기에 도움을 주는 주석만 있고 출처는 없음-->
'''장탕'''(張湯, ? ~ [[기원전 115년]])은 [[중국]] [[전한]] 중기의 대신이다정치가로, [[경조윤]](京兆尹) 두현(杜縣) 사람이다.
 
== 생애 ==
오늘날의 [[산시 성 (섬서성)|산시 성]](陝西省)의 [[시안 시]](西安市)시에 해당하는 두릉(杜陵)사람이다. [[전한 무제|무제]](武帝) 때 [[정위]](廷尉)<ref>현재의 사법장관</ref>, 어사대부(御史大夫)<ref>현재의 부총리.</ref>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조우 (전한)|조우]](趙禹)와 함께 율령을 정비하고, 피폐(皮幣), 백전폐(白全幣), 오수전(五銖錢)의 제조를 건의하고, 염철 전매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였으며, 고민령(告緡令)<ref>재산을 은닉하여 신고하지 않은 자는 1년간 변방수비에 강제동원하고 재산을 전부 몰수하였으며 위법자를 고할 경우 고발된 액수의 반을 보상금으로 지급하였고 알고도 모른척할 경우 같은 죄로 처벌하였다.</ref>을 제정하였다. 당시의 승상과 그의 상급자들이 모두 무능했던 탓에 사실상 그가 조정의 모든 대사를 좌지우지하였고 황제의 신임역시 대단하였다. 그러나 후에 상인들과 짜고 부정이득을 취하였다는 소문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이를 불명예로 여겨 자결하였다. 이것은 당시 그의 권력에 불만을 품은 [[주매신]](朱買臣) 등 승상부의 일부 비서관들의 참언으로 드러났고, 무제는 격노하여 그들을 즉시 처형하고 당시 승상이였던 [[장청적]](莊靑翟)에게는 자결을 명하였다. 이후 무제는 장탕의 아들인 장안세(張安世)를 후하게 대접하여 전한 말까지 명문 귀족으로써의 체면을 지켜나가도록 배려하였다.
 
==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