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문정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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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문하시중 중서시랑 평장사 참판도사사 태자이사 정당문학 태학사 첨지사.
문정공 문하시중 중서시랑 평장사 참판도사사 태자이사 정당문학 태학사 첨지사.


자는 차산이며 초명은 백일이시다. 호를 지포로 하시며 부령의 선학동(이에따라 훗날 선은동으로 명칭이 바뀜)에 지지포(대학삼강령의 하나인 지어지선을 깨우치는 곳)를 두어 도의를 강론하셨다.
자는 차산이며 초명은 백일이시다. 호를 지포로 하시며 부령의 선학동(이에따라 훗날 선은동으로 명칭이 바뀜)에 지지포(대학삼강령의 하나인 지어지선을 깨우치는 곳)를 두어 도의를 강론하셨다.

2015년 6월 22일 (월) 02:00 판

문정공 문하시중 중서시랑 평장사 참판도사사 태자이사 정당문학 태학사 첨지사.

자는 차산이며 초명은 백일이시다. 호를 지포로 하시며 부령의 선학동(이에따라 훗날 선은동으로 명칭이 바뀜)에 지지포(대학삼강령의 하나인 지어지선을 깨우치는 곳)를 두어 도의를 강론하셨다.

이규버로부터 나의 문필을 이어 재상이 될자는 오직 이 사람이시다. 라고 평해졌으며 무산(무산의 봉우리가 12개이므로 연령 12세를 의미한다)에 진사가 되셨기에 대과 역시 장원을 의심하는 이가 눈 앞에서는 있지를 않았으나 지공거 김양경이 자신의 의발을 전하기 위해 자신위 급제 등위인 갑과 2위로 천거하여 화응 범질의 고사로 축사를 대신하였기에, 세대가 전해지며 저 고령의 숙주와 빈한하던 사가정마저 이 용사를 가지고 스스로의 급제 등수를 얘기하며 흠연해 졌다고 한다.

국찬으로 지어진 동문선에 공의 절구 고시 계 발 표 전 과 같은 초려지문이 실려있으며 여조 때 최자는 김공께 '진효공 효함에 거하여 사해를 병탄하다'라는 제시문을 받어 들고서 그 자식에게 문장의 준칙이라 말하여 사은하였던 일화는 모두 고려사의 열전과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있다. 유경 이장용이 공을 이부로 공빙하였을 때 이미 국서를 관장하였기에 훗날 대사성이 될 때에도 '평장사'라고 숭칭되어 또 이규버의 찬미하는 말에 잇어서 '급제 김공, 학유 최해가 나라의 문장가로 족하다' 불리웠다.

<<전의발계>>는 지금까지도 변려팔고 중 [기린의 뿔] [대붕의 나래] 와 같이 칭송된다.

특히 역적 우봉의 최충헌의 자식 최이가 공의 천자를 맞이하여 굽어 모셨다고 하니 왜 제주에까지 돌문화의 은인이라는 미담이 서려있는가 고찰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접국에서 최초로 통문관을 두어 외교의 폐해를 없앨 뜻을 제창하였으며 몽노의 제국은 공의 문장 하나로 제 부당한 요구를 철회하고 양(제후의 예에 해당한다)을 선물하는 어여쁜 일을 해내기도 하였다.

동시대 안유와 위도의교 하셨다고 한다.

왕씨 4명의 실록이 공과 공의 문하에서 쓰여진 것이라하며 연경의 왕악 같은 자 역시 공의 문채를 흠모하였다.

천하인의 숭앙하는 마음이 세워져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도동서원이 창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