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시 다이지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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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9일 (금) 09:39 판

오이시 다이지로
大石 大二郎

기본 정보
국적 일본의 기 일본
생년월일 1958년 10월 20일(1958-10-20)(65세)
출신지 시즈오카 현 시즈오카 시
(현 : 시즈오카 시 스루가 구)
신장 166cm
체중 71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2루수
프로 입단 연도 1980년
드래프트 순위 2순위
첫 출장 1981년 4월 8일
마지막 경기 1997년 9월 11일
경력

선수 경력

감독·코치 경력


오이시 다이지로
일본어식 한자大石 大二郎
가나 표기おおいし だいじろう
국립국어원 표준오이시 다이지로
통용 표기오오이시 다이지로
로마자Daijiro Oishi

오이시 다이지로(틀:Ja-y, 1958년 10월 20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의 등록명은 ‘大石 第二朗’(동음).

인물

프로 입단 전

시즈오카 현 시즈오카 시에서 선어를 도소매업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에는 그의 형이 야구부 주장을 맡고 있어서 같은 부원이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애초에는 유도부에 들어갔지만 1학년 때인 6월에는 야구부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야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형과 똑같은 시즈오카 현립 시즈오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1학년의 여름부터 벤치에 들어가 1974년 여름에 열린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다음 해인 1975년에는 1번 타자로서 봄에 열린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는 등 팀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3학년 때에는 동급생이자 후에 프로 선수가 되는 구보데라 유지유격수를 맡았고 자신은 3루수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소속팀 선배가 1월 경에 다른 학교의 학생과 패싸움을 했던 사실이 후에 발각되면서 팀은 그 사건으로 인해 여름에 열린 현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경륜 선수가 될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부친의 권유로 아시아 대학에 진학, 3년차였던 1979년의 춘계 리그전에서는 17개의 도루를 기록해 당시 도토 대학 리그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대학 4년 동안 통산 91경기에 출전, 344타수 99안타, 타율 2할 8푼 8리, 4홈런, 25타점, 44도루를 기록했으며 베스트 나인에는 두 차례 선정되었다. 대학 졸업 후 이번이야말로 경륜 선수가 될려고 생각했었던 1980년의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긴테쓰 버펄로스로부터 2순위 지명을 받아 당시 아시아 대학 야구부 감독의 권유도 있어 긴테쓰에 입단했다.

선수 시절

입단 1년차인 1981년은 대주자나 수비 요원으로 출전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77경기의 출전하여 19타수를 기록했다. 그 해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마지막 지휘봉을 잡는 시즌이었고 정신이 없을 정도의 엄격한 연습으로 몸을 단련할 수 있었다. 이듬해 1982년은 시범 경기에서 부상당한 2루수빅터 해리스가 외야수로 변환되면서 시범 경기에서는 3할대 이상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등 2루수의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1982년 정규 시즌에서 성적은 타율 2할 7푼 4리, 12홈런, 47도루를 기록하여 신인왕과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재의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을 차지했다.

3년차인 1983년은 60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 후쿠모토 유타카의 연속 도루왕 기록을 13년으로 멈추었다. 그 해부터 1번·2루수로 활약, 2년 연속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수상과 동시에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다음해인 1984년에는 도루왕,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베스트 나인을 2년 연속으로 선정되면서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2루수로 성장했다. 1984년 올스타전 제3차전에서는 그 전까지 8연속 탈삼진 기록을 수립하고 있던 에가와 스구루와 상대하면서 2루 땅볼을 기록, 에나쓰 유타카와 대등한 9연속 탈삼진 기록을 저지했다.

1987년에는 통산 세 번째의 도루왕 타이틀을 석권하였지만 최근부터 오른쪽 어깨 통증이 연일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1988년 10월 19일에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했던 날의 하나로 여겨진 일명 ‘10월 19일의 비극’이 일어난 후인 11월에 오사카 후생연금 병원에서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았고 12월 8일에는 오사카 미야코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89년은 연초부터 부인과 함께 동행하면서 하와이사이판에서 재활훈련에 임하는 등 그 후에도 팀의 스프링 캠프에는 참가하지 않고 이시카와 현 고마쓰 시에 있는 온천에서 단독 트레이닝을 실시했다. 8월 3일의 오릭스전에서 오른쪽 장딴지의 근육 통증이 일어나는 등 1989년 시즌 출장이 109경기로 떨어졌지만 타율 2할 7푼 7리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현역 시절의 사건에서는 그 해의 리그 우승과 전년도의 ‘10월 19일의 비극’이 가장 추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그 후 일본 시리즈 첫 경기에서는 사이토 마사키로부터 일본 시리즈에서의 가장 유일한 기록인 1차전에서의 첫 회 선두 타자 홈런을 때려냈다. 그 후 2차전부터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면서 일본 시리즈에서의 최악의 기록이 되는 21타수 연속 무안타라는 불명예 기록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은 2011년 일본 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건스다니시게 모토노부가 오이시의 기록을 경신했다.

1990년에는 어깨가 완전하게 회복되면서 스프링 캠프로부터 순조로운 조정을 보이기 시작해 6월 26일의 롯데 오리온스전에서는 이라부 히데키로부터 끝내기 만루 홈런을 때려냈고 같은 해 리그 2위가 되는 타율 3할 1푼 4리와 20홈런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92년에 아라이 히로마사가 현역 생활을 은퇴하면서 야마모토 가즈노리가 입단한 1996년까지 사이에 팀내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1992년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 1,300만엔 증가의 1억 500만엔(추정)이 되면서 긴테쓰 구단 역사상 최초의 1억엔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고 35세가 되는 이듬해 1993년에는 6년 만에 도루왕 타이틀을 석권하는 등 도루왕 타이틀의 최고령 기록을 수립했다. 1994년경부터는 비주전 선수가 되면서 “40세까지의 현역 생활과 통산 2000안타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39세가 된 1997년 여름부터는 사사키 교스케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 출전 기회가 감소되면서 9월에는 구단으로부터 은퇴를 권유받았다. 이러한 구단의 자세를 적극 받아들여 1997년 시즌 끝으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평론가·코치 시절

은퇴 후는 긴테쓰로부터 2군 수비·주루 코치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바깥에서 야구를 보기 위해 간사이 TV의 야구 위원으로 발탁되었다. 그 외에도 후지 TV닛칸 스포츠에서도 해설 위원으로 맡았고 2003년부터 긴테쓰의 수비 주루 코치로 부임했다. 스프링 캠프에서는 슬라이딩 연습에 비디오를 도입해가면서 선수와 함께 플레이를 확인하고 개개인의 누간주 타임이나 세이프티 리드의 폭을 측정해서 주루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명확하게 개선시켰다. 3월 28일의 개막전에서는 첫 회부터 터피 로즈가 노 싸인으로 도루를 성공시키는 등 2003년은 팀의 도루 갯수가 크게 증가되었다.

2004년 시즌 종료 후 긴테쓰는 오릭스와의 합병으로 해체되면서 이듬해인 2005년에는 오릭스의 2군 팀인 서패스의 종합 코치로 취임했다. 그리고 감독인 가토 히데지가 허리 통증 때문에 휴양 하면서 감독 대행을 맡았고 다음해인 2006년에는 서패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군 감독인 나카무라 가쓰히로와는 스프링 캠프로부터 이틀에 한 번씩 전화하는 등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아 스프링 캠프에서는 자신이나 스카우터들도 타격 투수를 맡으면서 적극적인 지도를 실시했다. 전년도 최하위였던 팀을 상위권 진입에 경쟁하는 역할을 했다.

2007년부터는 1군의 수석 코치가 되었고 2008년부터는 내야 수비 주루 코치도 겸임했다. 같은 해 2008년 5월 21일에는 테리 콜린스가 시즌 도중에 감독직에서 사임하면서 1군 감독 대행으로 취임, 콜린스 감독의 사임을 구단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이틀 전이었다고 밝혔다.

오릭스 감독 시절

감독 대행에 오르면서 지금까지의 팀 방침을 일변해 나가는 등 선발 투수의 1경기당 100개의 투구 제한 철폐하고, 전임 감독이 하지 않았던 2군 시찰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2군에서는 오제 히로유키모리야마 마코토 등을 승격시켜 가지모토 다쓰야를 지배하 선수로 등록하는 등 적극적으로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는 것과 동시에 섬세한 지도를 하였다. 한편으로 터피 로즈와 알렉스 카브레라의 양 베테랑 선수에게는 실적을 존중하면서 자주적인 조정을 인정하고 양 선수의 성적을 합친 76홈런, 222타점의 맹활약으로 대우에 응했다. 또 2008년 마지막으로 은퇴한 기요하라 가즈히로에 대해서도 점수 차가 큰 경기에서 기용하지 않는 등의 기용 방식에서는 배려하고 있었다.

취임시에 빌린 돈 7로 5위였던 팀은 7월 하순에 자력 1위가 소멸했지만 이후에 원상 회복하면서 상위권 경쟁에 뛰어든 것으로부터 8월 2일에는 감독으로 승격했다. 이 일로 인해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의 선수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오릭스 버펄로스의 감독이 되면서 이듬해인 2009년에도 계속 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팀은 9월 상순에 2위로 올라서며 정규 시즌을 마쳤고, 최종적으로는 저금 7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결정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 스테이지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상대해 2008년 시즌 15승을 기록한 고마쓰 사토시를 첫 경기가 아닌 두 경기째에 선발로 등판시키는 대책을 취했지만, 실책이나 불안한 타선도 있어 팀은 패배했다.

2008년의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긴테쓰 시절의 동료였던 노모 히데오를 임시 투수 코치로 초빙했다. 이듬해 2009년은 전년도부터 기요카와 에이지, 아카호리 모토유키에 이어 현역 시절부터 오랜 친구 사이였던 사사키 오사무를 투수 코치로 임명하는 등 3명의 투수 코치를 두었다. 그러나 2009년 정규 시즌에 팀 평균자책점은 12구단 가운데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고 4명의 외국인 선수(로즈, 카브레라, 그렉 라로카, 호세 페르난데스)들의 부상으로 인한 장기 이탈과 타선에서의 장타력도 부진을 겪는 등의 악재가 겹쳤다. 결국 6월에는 4승 14패와 승률 2할 2푼 2리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팀은 2년 만에 최하위(6위)로 떨어지는 등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카무라 가쓰히로 구단 본부장(9월 30일까지)과 함께 해임되었다.

그 후

이듬해인 2010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수석 코치로 부임, 2013년까지 맡았다.

상세 정보

출신 학교

선수 경력

지도자·기타 경력

수상·타이틀 경력

타이틀

  • 도루왕 : 4회(1983년, 1984년, 1987년, 1993년)

수상

개인 기록

첫 기록

기록 달성 경력

기타

  • 올스타전 출장 : 9회(1982년 ~ 1984년, 1986년 ~ 1987년, 1989년 ~ 1990년, 1992년 ~ 1993년)

등번호

  • 43(1981년 ~ 1982년)
  • 4(1983년 ~ 1997년)
  • 81(2003년 ~ 2009년)
  • 80(2010년 ~ 2013년)

등록명

  • 大石 大二郎 (おおいし だいじろう)(1981년 ~ 1987년 9월 14일, 1991년 ~ )
  • 大石 第二朗 (おおいし だいじろう)(1987년 9월 15일 ~ 1990년)

연도별 타격 성적















2

3



















4












O
P
S
1981년 긴테쓰 77 20 19 14 6 0 0 0 6 0 11 5 0 0 0 0 1 4 0 .316 .350 .316 .666
1982년 129 573 492 86 135 16 1 12 189 41 47 12 23 2 55 1 1 42 7 .274 .347 .384 .731
1983년 130 592 506 90 145 23 6 10 210 46 60 14 14 2 62 1 8 64 4 .287 .372 .415 .787
1984년 130 598 528 97 149 22 5 29 268 65 46 19 10 0 58 5 2 58 5 .282 .355 .508 .863
1985년 83 375 321 62 99 21 4 11 161 45 19 4 12 2 35 1 5 32 3 .308 .383 .502 .884
1986년 130 595 538 95 156 16 12 16 244 55 24 14 12 6 33 3 6 47 5 .290 .334 .454 .788
1987년 130 586 532 75 141 26 4 5 190 42 41 9 10 3 39 1 2 58 6 .265 .316 .357 .673
1988년 128 558 488 65 123 13 9 5 169 34 16 9 18 1 51 0 0 55 4 .252 .322 .346 .669
1989년 109 471 401 70 111 22 1 8 159 33 14 4 21 0 48 1 1 46 4 .277 .356 .397 .752
1990년 125 541 471 93 148 25 6 20 245 69 20 4 15 4 49 0 2 51 8 .314 .378 .520 .898
1991년 125 548 459 77 123 22 3 6 169 42 12 7 18 4 62 0 5 65 7 .268 .358 .368 .727
1992년 130 576 487 76 131 24 6 6 185 47 39 13 23 1 62 1 3 56 4 .269 .354 .380 .734
1993년 127 547 470 69 121 10 2 10 165 49 31 7 23 0 51 0 3 65 6 .257 .334 .351 .685
1994년 84 320 274 44 74 15 0 2 95 33 11 1 12 1 31 0 2 37 7 .270 .347 .347 .694
1995년 102 354 303 43 73 13 1 4 100 21 11 6 9 2 38 2 2 52 5 .241 .328 .330 .658
1996년 80 271 224 36 49 7 3 2 68 19 11 1 10 5 29 1 3 44 4 .219 .310 .304 .614
1997년 73 183 151 24 40 6 0 2 52 13 2 2 6 3 22 1 1 22 2 .265 .356 .344 .700
통산 : 17년 1892 7708 6664 1116 1824 281 63 148 2675 654 415 131 236 36 725 18 47 798 81 .274 .347 .401 .749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

연도 소속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자책점 연령
2008년 오릭스 2위 95 54 40 1 .574 2.5 152 .262 3.93 50세
2009년 6위 144 56 82 2 .394 26.0 118 .274 4.58 51세
통산 : 2년 239 110 126 3 .466 A클래스 : 1회, B클래스 : 1회
  1. 2008년 시즌은 5월 23일부터 전임 감독이었던 테리 콜린스를 대신해 지휘를 맡았음.
  2. 이탤릭체는 시즌 도중의 성적.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