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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퇴 ===
=== 쇠퇴 ===
시에나는 1348년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또한 금융 산업 역시도 타격을 입었다. 1355년 [[카를 4세]]가 이곳에 부임하고 나서, 인구가 늘어났고 노바 의회 정권을 억눌렀으며, 노베스키 정당과 관련된 모든 가문들을 추방하였다. 시에나인들은 대중들의 도움을 받아 귀족들로 이뤄진 도디치(Dodici) 의회를 출범시켰다. 이 정권 또한 1385년에 퀸디치(Quindici, 15명) 개혁가들로 교체되며 단명하였고, 그후로 디에치(Dieci, 10명, 1386년–1387년), 운디치(Undici, 11명, 1388년–1398년), 끝으로 열 두 명의 관리들(1398년–1399년)이며, 피렌체의 확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밀라노]]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게 시에나의 주권을 내줬다.

1404년에 비스콘티 세력을 축출하고 10명의 관리들로 이뤄진 정권을 설립하여, [[나폴리의 라디슬라오]]에 대항하여 피렌체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시에나 출신의 [[교황 비오 2세|비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노베스키 당과 관련되었던 귀족들의 귀향을 허락하였다.

=== 페트루치 시대 ===


== 함께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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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일 (수) 01:57 판

시에나 공화국
Repubblica di Siena

11세기~1555년

수도시에나
정치
정치체제공화제
역사
역사 
 • 성립11세기
 • 멸망1555년
인문
공용어토스카나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시에나 공화국(이탈리아어: Repubblica di Siena)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에 있는 시에나에 있었던 나라이다.

11세기부터 1555년까지, 5세기 넘게 존재했었던 나라이다. 이탈리아 전쟁 기간에 시에나 공화국은 스페인 왕실과 동맹이였던 경쟁국인 피렌체 공화국에게 패배하였고, 18달 동안의 저항 끝에 1555년 4월 17일 항복하며 공화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역사

기원

시에나의 오래된 귀족 가문 계층들은 774년에 샤를마뉴에게 항복한 롬바르드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프랑크족 감시자들이 기존의 시에나 귀족들과 결혼하면서 밀려들어왔고 이렇게 남겨진 그 유산은 시에나 영토 곳곳에 남아있는 수도원들에서 발견된다. 1115년 국경 지역 토스카나 후국토스카나의 마틸데 공작부인이 사망하고 여러 자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성장

시에나 공화국의 중세시대 동전 (12세기)

시에나는 대금업의 핵심 중심지이자 양모 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도시 국가로서 번영하였다. 처음에는 주교의 직접 통치를 받았지만, 12세기 동안에 주교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시에나 주교는 아레초와의 국경 분쟁 기간에 귀족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에 도시 운영권을 그들에게 넘겨주는걸 인정을 마지 못해 승낙하였고, 이것이 주교의 통치에서 벗어나 시에나 코무네가 독립을 선언한 1167년에 과정의 시작이였다. 1179년에 공화국 헌법이 쓰여졌다.

1286년에 시에나를 통치할 노바(Nova) 정권이 세워졌다. 노바는 의회를 구성하는 귀족 가문들이 형성한 정치 조직인 노베스키의 지지를 받았다. 마침내 노베스키 당은 노바 의회뿐만 아니라 시에나의 많은 중요 귀족 가문들로 성장하였다. 노바 정부와 노베스키 당의 통치하에서, 시에나는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이어나갔다.

몬타페르티 전투

13세기에 들어서, 시에나는 대게 기벨린이였고 이와 대조적으로 피렌체구엘프 세력이였다(이 분쟁은 단테의 《신곡》 일부의 배경이 되었다).

1260년 9월 4일 시에나의 기벨린파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국왕의 군대의 도움을 얻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피렌체의 구엘프파를 패배시켰다. 전투 이전 시에나 군대는 대략 20,000명은 그들보다 많았단 피렌체의 33,000명의 군대와 직면했다. 전투에 앞서 시에나 시 전체는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올렸다(이는 시에나 역사에서 몇 차례 있었던 일이고, 가장 최근은 1944년에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하였다). 전쟁 기간에 시에나 군 통솔권이 주어졌던 보나구이다 루카리(Bonaguida Lucari)는 목 주변 홀터도 하지 않은 머리에도 아무것도 쓰지 않은체 맨발로 두오모로 걸어나갔다. 시에나의 모든 거주민들로 이뤄진 행렬을 이끈 그는 모든 성직자들을 만났다. 루카리와 주교들은 포옹함으로서, 교회와 나라의 통합을 보여줬고, 그후 루카리는 공식적으로 시에나와 콘트라다를 성모에게 받쳤다. 전설에 따르면 전장에서 짙고 하얀 구름이 시에나군을 덥어 그들의 공격을 도왔다고 한다. 실상은 피렌체군이 전투 당시에 시에나군에게 성과없는 몇 차례 공격을 펼쳤고, 그후 시에나군의 맹렬한 반격과 피렌체군에 있던 배반자가 군 지도자를 암살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피렌체군은 와해되어 전장에서 이탈하였다. 결과적으로 피렌체군의 절반 가량(약 15,000 명)이 사망하였다. 이 충돌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두 도시가 스포츠 경기에서 만나게 되면, 시에나 관중들은 피렌체 관중들에게 "몬타페르티를 기억하라!"라고 외친다.

쇠퇴

시에나는 1348년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또한 금융 산업 역시도 타격을 입었다. 1355년 카를 4세가 이곳에 부임하고 나서, 인구가 늘어났고 노바 의회 정권을 억눌렀으며, 노베스키 정당과 관련된 모든 가문들을 추방하였다. 시에나인들은 대중들의 도움을 받아 귀족들로 이뤄진 도디치(Dodici) 의회를 출범시켰다. 이 정권 또한 1385년에 퀸디치(Quindici, 15명) 개혁가들로 교체되며 단명하였고, 그후로 디에치(Dieci, 10명, 1386년–1387년), 운디치(Undici, 11명, 1388년–1398년), 끝으로 열 두 명의 관리들(1398년–1399년)이며, 피렌체의 확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밀라노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게 시에나의 주권을 내줬다.

1404년에 비스콘티 세력을 축출하고 10명의 관리들로 이뤄진 정권을 설립하여, 나폴리의 라디슬라오에 대항하여 피렌체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시에나 출신의 비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노베스키 당과 관련되었던 귀족들의 귀향을 허락하였다.

페트루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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