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신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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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6월 : 오사카 본사가 마지막으로 납활자 신문 제작을 중단함. 컴퓨터 신문 제작 시스템 '넬슨'으로 완전 이행.
* 1988년 6월 : 오사카 본사가 마지막으로 납활자 신문 제작을 중단함. 컴퓨터 신문 제작 시스템 '넬슨'으로 완전 이행.
* 1988년 6월 : 이른바 '[[리크루트 사건]]' 특종.
* 1988년 6월 : 이른바 '[[리크루트 사건]]' 특종.
* 199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종군 위안부」문제의 연재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기사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 저의 『제 전쟁 범죄·조선인 연행 강제 기록』에 있는 「쇼와(昭和)18년(1943년)에 군의 명령으로 한국의 제주도(濟州島)에서 여성을 강제 연행해서 위안부로 했다」라고 하는 체험 담을, 4회 (이 4회를 포함시키고, 요시다(吉田)에 관해서는 계16회)에 걸쳐 보도하고, 아침 해는 「(조선)총독부에 50명,혹은 100명의 경관과 하나가 되어서 마을을 포위하고, 여성을 도로에 내쫓는다. 목검을 휘둘러서 여성을 때리고, 차고, 트럭에 가득 채운다」 「요시다(吉田)씨들이 연행한 여성은, 적어 보아도 950명 쓸었다」 (1992년1월23일 1면 칼럼 「창문논설위원실로부터」)등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요시다(吉田)의 「체험 담」은 하다(秦) 이쿠히코(郁彦)·타쿠쇼쿠대학(拓殖大學) 교수(당시)의 조사에 의해 거짓말인 것이 밝혀지고,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 본인도 일부가 픽션인 것을 인정했다. 또, 아사히신문도 1997년3월31일에 「확인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상의 정정 기사를 냈다.
* 1996년 : 서부 본사의 제작(조판 등) 기능이 후쿠오카 본부로 이전.
* 1996년 : 서부 본사의 제작(조판 등) 기능이 후쿠오카 본부로 이전.
* 2002년 3월 : 46년간 이어온 일요일판 폐지, 4월부터 새롭게 토요일판 '''be'''를 발간.
* 2002년 3월 : 46년간 이어온 일요일판 폐지, 4월부터 새롭게 토요일판 '''be'''를 발간.

2015년 2월 18일 (수) 04:07 판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
국가일본
언어일본어
간행주기일간
판형타블로이드배판
가격150(아침판), 50엔 (저녁판)
발행법인아사히 신문사
웹사이트www.asahi.com
아사히 신문사 사 깃발  Flag of the Asahi Shinbun Company

아사히 신문(틀:Ja-y)은 일본신문이다. 1879년 오사카에서 창간됐으며, 아사히 신문사가 발행하고 있다.

이 신문은 일본의 3대 신문 중 하나이며, 도쿄오사카 등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발행되고 있다. 발행 부수는 약 800만부이다.

한국의 한겨레과 같이 ,허핑턴 포스트과 제휴하고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좌파의 신문으로서 인식되어 있는 신문이다.

연혁

  • 1879년 1월 : 오사카에서 창간.
  • 1882년 : 정부와 미쓰이 은행으로부터 경영 자금 원조를 받기 시작.
  • 1888년 : 7월 도쿄의 메자마시 신문을 매수해 도쿄 아사히 신문을 창간, 도쿄 진출.
  • 1889년 : 오사카 본사 발행 신문을 '오사카 아사히 신문'으로 제목을 고침.
  • 1915년 : 오사카 아사히가 석간지 발행 개시. 오사카 아사히가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현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
  • 1918년 : 백홍 사건
  • 1923년 9월 : 관동 대지진조선인 폭동의 유언비어 기사를 게재
  • 1935년 2월 : 서부 본사 발행 개시.
  • 1935년 11월 : 나고야 본사 발행 개시.
  • 1936년 2월 26일 :2.26 사건, 반란군이 도쿄 아사히 신문사의 사옥을 습격.
  • 1940년 : 오사카 아사히와 도쿄 아사히가 아사히신문으로 표제를 통일.
  • 1942년 : 조르게 사건으로 도쿄 본사 정치 경제부장 다나카 지로 (3월 15일), 같은 부원 이소노 키요시(4월 28일)가 체포됨.
  • 1950년 9월 27일 : 일본 공산당 간부 이토 률과 단독 회견 기사를 게재. 하지만 나중에 담당 기자에 의해 이토 률과의 기사는 날조된 것으로 드러남.
  • 1959년 6월 : 홋카이도 지사 발행 개시.
  • 1963년 12월 24일 : 무라야마 사주가 상무 이사이자 도쿄 본사 업무 국장인 나가이 다이조우를 해임. 사내 분쟁 '무라야마 사건'이 시작됨.
  • 1980년 11월 : 도쿄 본사가 지요다 구 유라쿠초에서 주오 구 쓰키지로 이전. 납 활자를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 제작에 의한 신문 제작 시스템 '넬슨'도입.
  • 1987년 5월 : 효고 현 니시노미야 시의 한신 지국에서 기자 살상 사건 발생, '적보대'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자신의 범행이라는 성명을 냄.(이른바 적보대 사건, 미해결 상태로 2003년 공소시효 성립).
  • 1988년 6월 : 오사카 본사가 마지막으로 납활자 신문 제작을 중단함. 컴퓨터 신문 제작 시스템 '넬슨'으로 완전 이행.
  • 1988년 6월 : 이른바 '리크루트 사건' 특종.
  • 199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서 「종군 위안부」문제의 연재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기사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 저의 『제 전쟁 범죄·조선인 연행 강제 기록』에 있는 「쇼와(昭和)18년(1943년)에 군의 명령으로 한국의 제주도(濟州島)에서 여성을 강제 연행해서 위안부로 했다」라고 하는 체험 담을, 4회 (이 4회를 포함시키고, 요시다(吉田)에 관해서는 계16회)에 걸쳐 보도하고, 아침 해는 「(조선)총독부에 50명,혹은 100명의 경관과 하나가 되어서 마을을 포위하고, 여성을 도로에 내쫓는다. 목검을 휘둘러서 여성을 때리고, 차고, 트럭에 가득 채운다」 「요시다(吉田)씨들이 연행한 여성은, 적어 보아도 950명 쓸었다」 (1992년1월23일 1면 칼럼 「창문논설위원실로부터」)등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요시다(吉田)의 「체험 담」은 하다(秦) 이쿠히코(郁彦)·타쿠쇼쿠대학(拓殖大學) 교수(당시)의 조사에 의해 거짓말인 것이 밝혀지고, 요시다(吉田) 기요하루(淸治) 본인도 일부가 픽션인 것을 인정했다. 또, 아사히신문도 1997년3월31일에 「확인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실상의 정정 기사를 냈다.
  • 1996년 : 서부 본사의 제작(조판 등) 기능이 후쿠오카 본부로 이전.
  • 2002년 3월 : 46년간 이어온 일요일판 폐지, 4월부터 새롭게 토요일판 be를 발간.
  • 2003년 6월 : 서부 본사, 기타큐슈 시 고쿠라키타 구 안에서 신축 이전.
  • 2004년 1월 1일 : 남극 지국 개설.
  • 2005년 4월 1일 : 컴퓨터 제작에 의한 신문 제작 시스템을 '넬슨'에서 신미디어계 시스템으로 이행.
  • 2005년 4월 3일 : 일요일판의 부활 격인 'be on Sunday' 창간. 토요일판은 be on Saturday로 제목을 고침.
  • 2005년 : 회원제 사이트인 아스파라클럽 시작.
  • 2006년 1월 : 아사히 신문 창간 127주년 기념 '저널리스트 선언'이라고 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고 대대적으로 선전.
  • 2014년 8월 5일 : 아사히 신문은 독자검증의 결과, 요시다 마사오(吉田 昌郞,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책임자) 증언의 증거가 찾지 않고, 허위라고 인정해 기사를 철회했다. 그러나 독자에게 대한 사죄는 일체 없고, 또, 아사히 신문 사장의 기무라(木村) 다다카즈(伊量)는 사죄를 하지 않을 방침을 밝혔다. 매스 미디어로서의 설명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있는 태도에 대해서, 일본 국내의 매스컴(mass communication)에서 비판이 일어나고, 지상논쟁이 되풀이되었다. [1][2]
  • 2014년 9월 11일 : 아사히 신문이 두 건의 요시다 오보 파문을 일으키고 마는 것에 대해 기무라 다다카즈 아사히 신문 사장이 독자들과 도쿄 전력 관계자들에게 사죄를 드렸다. [3]기무라 사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주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고 1980년대에 증언했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 관련 기사를 지난 달 5일 취소한 것도 “정정이 너무 늦어 독자 여러분께 사죄한다”고 밝혔다.[4]

같이 보기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