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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엽 (156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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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욕설
== 생애 ==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성혼]](成渾)과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사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처가는 [[북인]] [[이산해]]의 가문이었다. [[1583년]]([[조선 선조|선조]] 16)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1587년]]에 감찰(監察)·형조 좌랑을 지내었다. [[1593년]] 황주 판관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그 공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수찬(修撰)·장령(掌令) 및 서천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예조 정랑으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성(司成)이 되고, 수원 부사를 거쳐 이듬해 응교로 필선을 겸임하였다. 이어 승지·형조 참의·나주 목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1602년]](선조 35)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가 [[1606년]] 성주(星州) 및 홍주(洪州)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 초 예조 참의·대사성·승지·판결사(判決使)·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0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로 왕을 경연에 자주 나가도록 했고, [[대북]]이 집권한 뒤에도 그의 처당숙이 [[이산해]]였던 탓에 관직에 계속 나갈 수 있었다. [[1614년]] 공조 참판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1년 만에 사퇴했다. 그 뒤 [[서인]]들하고 교류하다가 [[인조 반정]]을 지지하게 된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 겸 동지경연·원자사부(元子師傅)가 되어 학제(學制)를 상정했고, 여러 번 다른 직에 전임되었으나, 언제나 대사성을 겸함으로써 이때부터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좌부빈객 등을 지냈다. [[이괄의 난]] 당시 인조에게 공주로 피할 것을 청하였다.
 
== 국조인물고 ==
원본글 출처 정엽의 비명(碑銘), 저자 이정귀(李廷龜)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52
우리 임금이 왕위에 오른 3년 뒤인 천계(天啓)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 좌참찬(左參贊) 정공(鄭公)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고 그날로 찬성(贊成)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이조(吏曹)에서 격식(格式)에 위배된다고 난색을 표명하자 다시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의 벼슬을 추증(追贈)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임금이 평소에 공에게 임명하려고 한 것으로 사후에 보답한 것이었다. 조회를 중지하고 채소 반찬을 들었으며 이어 특별히 명하여 예장(禮葬)을 치르도록 하고 부의(賻儀)를 관례보다 더 하사하였다. 공이 병환이 위독하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사정(邪正)을 분변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아 차자(箚子)를 엮었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손자 정원(鄭援)이 대궐에 나아가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선경(先卿)이 남긴 차자를 보니,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을 잊지 않아 그 절실한 충직(忠直)이 보통보다 월등하였으므로 재삼 펼쳐서 읽어보고 내 매우 슬퍼 탄식하였다. 내가 비록 아는 것이 적고 사리에 어둡지만 감히 마음에 새기어 선경이 지하에서 소망한 것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여 한 부를 베껴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아! 여기에서 군신(君臣)의 사이를 볼 수 있다.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문숙(文肅)이라고 정하였다. 그의 벗 연안(延安) 이정귀(李廷龜)가 공의 사위인 학사(學士) 나만갑(羅萬甲)이 지은 행장(行狀)에 따라 공의 묘소에 세울 비석의 명(銘)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은 초계 정씨(草溪鄭氏)인데, 휘(諱)는 엽(曄)이고, 자(字)는 시회(時晦)이다. 일찍이 꿈속에서 주자(朱子)가 손을 잡고 ‘하늘에도 가득 차고 땅에도 가득 찼으니,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盈天盈地勿忘勿助]’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보였는데, 공이 꿈에서 깨어나 자부심을 가져 그 글을 써서 벽에다 붙여놓고 이어 호를 ‘수몽(守夢)’이라고 지었다. 6대조 정발(鄭發)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증조(曾祖) 정희년(鄭熙年)은 찰방(察訪)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정선(鄭璇)은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정유성(鄭惟誠)은 진사(進士)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벼슬이 추증되고 봉해진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은 가정(嘉靖)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특이한 자질이 있어 3세에 글을 배웠다. 4세에 여러 아이들과 이웃집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율곡(栗谷)ㆍ임당(林塘) 두 분이 보통보다 뛰어난 공을 보고 성명을 물어보자 나이와 더불어 매우 분명하게 대답하였고 시를 배웠는지 물어보자 곧바로 틀리지 않고 대답하였으므로 온 좌석이 경탄(敬歎)하며 신동(神童)이라고 하였다. 16세에 판서(判書) 이 명곡공(李鳴谷公, 이산보(李山甫))의 가문으로 장가를 들었다. 그의 숙부(叔父)는 세상에서 일컫는 토정 선생(土亭先生)이란 분이었는데, 그가 공을 보고 매우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큰 이름을 떨칠 것이다.”고 하였다. 명곡공이 공에게 스승을 찾아 공부하라고 권하자 공이 곧바로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배웠고, 이어 우계(牛溪)ㆍ율곡(栗谷) 두 선생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에 호방한 습관을 털어내고 단정과 엄숙으로 자신을 견지하였으며 경서의 뜻을 분석하고 학습의 의향을 분변하며 여러 사람과 즐겁게 지내면서 유익한 바를 구하니, 더불어 교유한 사람들이 모두 다 일시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공이 나와 더불어 책을 지고 도봉 서원(道峰書院)으로 가서 이불을 같이 덮고 4개월 동안 묵으면서 서로 학문을 강마하고 익혔는데, 그때 공의 나이는 19세였고 나의 나이는 18세였다. 공이 이미 말을 천천히 하고 걸음걸이를 법도가 있게 하여 신심(身心)을 수렴한 것을 보고 내가 매우 존경하였는데, 그 마음이 오래되어도 여전히 시들지 않았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공이 먼저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다가 이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추천되었다. 이윽고 의정공(議政公)의 상(喪)을 당하였고 상복(喪服)을 벗자 차례에 따라 승진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에 전중(殿中)을 거쳐 형부 원외(刑部員外)가 되었다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김포 현감(金浦縣監)으로 나갔다. 어버이가 병환을 앓자 벼슬을 버리고 수년간 두문불출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할머니 상을 당하여 승중복1)(承重服)을 입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상복을 벗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하여 불렀다. 그때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연석(宴席)에서 왜적에게 화친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기를, “우리나라는 드러내놓고 화친을 말할 것이 없고 다만 명(明)나라 장수의 말에 의거해 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화친을 하고 싶으면 화친을 하고, 불가하면 불가한 점을 개진해야 한다. 군신(君臣)의 사이에 어찌 두 가지 설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조(宣祖)가 말하기를, “이는 선비로서 없어서는 안 될 의논이다.” 하였다. 정 송강(鄭松江)공이 강직한 성격으로 당시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많이 샀는데 세상을 떠나자, 최영경(崔永慶)에게 죄를 덮어씌워 죽였다고 무함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놓고 이어 일대의 사류(士類)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고 하였다. 공이 홍문관에 있는 것을 기탄하였고 공이 이조의 추천에 든 것을 더욱더 시기한 나머지 갑자기 장령(掌令)으로 승진시키자 사양하여 체차되었고, 곧바로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임명하였는데, 얼마 안 지나 파직되어 돌아왔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있다가 고급사(告急使)에 차출되어 밀운 군문(密雲軍門)에 가서 병력을 요청하였다. 돌아와서 사성(司成)ㆍ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었다. 수원은 경기의 요새 성읍으로 새로 군사를 나누어 삼남(三南)의 큰길목을 담당하였으며 공이 정성을 다하여 어루만지니, 백성이 안도하여 부모처럼 떠받들었는가 하면 고을 백성들이 서천에서처럼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응교(應敎)ㆍ집의(執義)에 임명되어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겸임하였다. 이윽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가 체차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동지사(冬至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와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돌아갔다. 그 뒤 병조 참지(兵曹參知)ㆍ대사간(大司諫)ㆍ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고, 도사 영위사(都司迎慰使)가 되어 관서(關西)에 갔다. 기자헌(奇自獻)이 인척으로 벼슬길에 나와 은밀히 권력을 도모하려고 겉으로 사류(士類)를 좋아하는 척하였으므로 당시의 의논이 그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추천하였으나 공이 평소 그의 사람 됨됨이를 미워한 나머지 불가하다고 하였다. 기자헌이 누차 공의 집에 들렀으나 공이 한 번도 답례하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기자헌이 크게 앙심을 품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에 이르러 문경호(文景虎)가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아 상소하여 우계(牛溪)를 배척하자 공의 여러 벗들이 모두 다 배척을 받아 쫓겨났는데, 공이 제일 먼저 쫓겨나 종성 부사(鍾城府使)가 되었다. 세금을 징수하고 병기를 수리하는 겨를에 학교에 대한 정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여 여러 생도들에게 과정을 정하여 시서(詩書)와 예법(禮法)을 가르쳤는데, 종성 사람들이 공으로 인해 비로소 책을 가지고 다녔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오랑캐의 기병 수만 명이 갑자기 성 아래에 이르렀다. 공이 그때 ≪춘추(春秋)≫를 읽고 있다가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조용히 책을 덮고 관복을 차려입고 나서 성루(城樓)로 올라가 성 안의 노약(老弱)한 남녀를 모집하여 모두 군복(軍服)을 입혀 성가퀴를 나누어 지키도록 한 다음에 깃발을 많이 세워놓고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적병이 성을 7주야(晝夜)를 포위하고 있다가 수비가 있는 것으로 의심한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떠나고 다만 한 사람만 붙잡혀갔다. 이에 그 즉시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런데 기자헌이 성을 완전히 지키고 적병을 물리친 공로는 거론하지 않고 결국 한 사람이 붙잡혀간 것을 죄안으로 꾸며서 의금부로 붙잡아다 국문한 다음에 동래(東萊)로 귀양을 보냈다. 종성의 선비들이 울부짖으며 따라와 항의의 상소를 올려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공은 유배지에 있을 때 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즐기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ㆍ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갔고,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고,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고,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예조 참의(禮曹參議)ㆍ승지(承旨)ㆍ판결사(判決事)ㆍ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광해(光海)가 경연(經筵)에 나오지 않아 공이 간하니, 광해가 감동하여 그 이튿날 경연을 열었다. 경연에서 어떤 신하가 궁중의 말이 밖으로 나간다고 아뢰자 공이 말하기를, “신은 외부의 말이 궁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려한다.”고 하니, 소인배들이 눈을 흘겨보았다. 체차되어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가 품계가 승진되어 참판(參判)이 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박응서(朴應犀)가 옥중에서 고변하니,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들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국구(國舅)와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일시의 명류(名流)들이 체포되어 옥에 가득 차 있었다. 공이 동료들과 더불어 아뢰려고 하니, 동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상소 한 장을 엮어 올리려고 하니, 대부인(大夫人)이 눈물을 흘리며 중지시키므로 상소의 초안을 가져다 불태워버렸다. 공이 연달아 상소하자 지신사(知申事)로 체차되었다가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다.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가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때마침 내가 공과 같이 대비(大妃)가 계시는 경운궁(慶運宮)으로 가서 서반(西班)의 관직에 서용된 것을 사은(謝恩)하려고 갔는데, 궁문을 폐쇄한 지 이미 수년이 되어 잡초가 뜰과 계단을 뒤덮어버렸으므로 서로 쳐다보며 눈물을 훔치었다. 그때 큰 가뭄이 들어 남문(南門)을 닫아버렸다. 공이 말하기를, “열린 문을 닫을 필요가 없고 닫힌 문을 열어놓으면 하늘이 반드시 비를 내릴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누설되었다. 이이첨이 매우 노하여 국문(鞫問)을 열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이이첨에게 말하기를, “이는 한 번 해학을 해본 것 같다. 왜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하는가?”라고 하자, 이이첨이 말하기를, “해학을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여움이 조금 풀려서 나와 공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공은 계축년 이후부터 벼슬할 뜻이 없었다. 비록 대부인 때문에 애써 한산한 직책에 있기는 하였지만 절반은 강호(江湖)에 있었고 한 번도 녹봉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모후(母后)를 폐위하자는 의논이 조석 간에 제기되려고 하자, 공이 극력 외직을 요구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백관들이 대궐 뜰에 나가 모후를 폐위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때 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법망(法網)에 걸리었으나 공은 영외(嶺外)에서 벼슬하며 숨어살다가 혼자 화를 면하였다. 한 해가 넘어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되어 여강(驪江)으로 돌아왔다. 광해(光海)가 엄한 하교를 내려 태만하게 교외에서 휴식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을 책망하고 또 이르기를, “정 아무개는 일체 출사하지 않으니 그 의도를 알 수 없다.”고 하므로, 공이 상소하여 처벌을 기다리면서, “신이 일찍이 임금의 측근에 있을 때에 정성을 쌓고 뜻을 다하여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어버이는 늙었는데, 형제가 없어서 어버이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사양한 채 끝내 나가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우리 임금이 의리를 들어 반정(反正)하였을 때 공이 며칠 뒤에 비로소 경운궁에 나가 사은(謝恩)하였다. 공이 광해를 강화도(江華島)로 유배한다는 말을 듣고 대신(大臣)들에게 말하기를, “폐주(廢主)가 비록 스스로 하늘과 관계를 끊기는 하였으나 신하들이 일찍이 섬기었으니, 마땅히 곡하며 전송해야 한다.”고 하니, 주위 사람들이 실색(失色)하여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공이 혼자 하려고 하였으나 광해가 이미 나가버렸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광릉(廣陵)에 있을 적에 어떤 서생(書生)이 공에게 은밀히 반정의 거사에 대해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인륜(人倫)이 이미 끊어져버렸으니, 이때에는 종묘와 사직이 중요하다. 다만 한 번 차질이 생겨 사류(士類)가 모두 섬멸될 경우에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라도 뒤따라 망할 것이다. 나처럼 사리에 어두운 선비는 마땅히 천지의 큰 분수를 지킬 뿐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점차로 잘못 전달되어 공의 죄안(罪案)이 되어버렸으므로 공이 병환을 핑계대고 향리로 돌아갔다. 여러 명인(名人)들이 공이 조정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모두 다 물러나가려고 하자, 공을 배척한 사람이 크게 후회하여 옛날처럼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다 함께 국사에 힘쓸 것을 다짐하니, 분분한 의논이 안정되었다. 임금이 교화를 밝히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것을 급무(急務)로 여기어 한때 선비들의 명망이 있는 사람을 간택하여 사유(師儒)의 장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 조정에 자문하니, 대신이 입을 모아 공을 추천하였다. 공이 이내 대사성(大司成)으로 동지경연(同知經筵)ㆍ원자 사부(元子師傅)를 겸임하였다. 공이 학교의 제도를 상정(詳定)하여 대대적으로 학교와 재실(齋室)을 수리해놓고 선비들로 하여금 거처하면서 학문을 강론하고 날마다 책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도록 하였는데, 모두 법도가 있어 볼만하였다. 광해의 혼란한 조정 때 죄인을 국문한 공로로 품계가 승진된 자들을 이때에 이르러 대간(臺諫)이 아뢰어 모두 다 벼슬을 삭제하였는데, 공도 자헌 대부의 품계를 반납하였다. 그때 이조 참판의 자리가 비어서 공이 첫 번째 후보로 선발되었으나 임금이 공이 아니면 선비를 육성할 수 없다고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 오래 있다가 임금이 대신에게 묻기를, “옛날에 실직(實職)에 있으면서 대사성을 겸임한 사람이 있었는가? 정 아무개는 어찌 한 임무만 국한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고 특별히 명하여 대사성을 유임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누차 다른 곳으로 전직될 때마다 옛날처럼 겸임하였는데, 이는 전에 없던 특별한 예우였다. 공이 일찍이 나아가 말하기를, “날마다 경연(經筵)에 납시어도 성상의 학문이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간절히 질문하고 깊이 생각하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럭저럭 대충 넘어가는 데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바라건대, 야기(夜氣)가 청명할 때 자주 유신(儒臣)들과 토론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그 다음날 야대(夜對)를 명하였다. 공이 또 임금에게 침묵만 지키지 말 것을 경계하고 이어 말하기를, “임금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걱정하고 근면해도 다스려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는데, 이는 사사로운 것을 타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고, 이내 임금에게 아무 일은 사사로운 것이고 아무 조처는 사사로운 일이란 것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여염의 여자들이 궁중에 있고 폐위된 광해조 때 궁녀들이 다시 궁중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모두 다 축출하였으면 합니다.”고 하니, 임금이 모두 가상히 받아들였다. 광해가 일찍이 병환이 났을 때 공이, 중종(中宗)이 연산군(燕山君)을 대우한 규례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신이 광해를 10여 년간 섬겼으니, 견마(犬馬)의 마음속에 어찌 옛정이 없겠습니까?”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임금이 감동하여 담당 관사로 하여금 의복과 생활용품을 넉넉히 보내라고 명하였다. 공이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공에게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약 남하하면 주상(主上)에게 청하여 친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송도(松都)로 진주하여 ‘친히 정벌한다.’고 세상에 크게 알리어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진정시켰으면 한다.”고 하였다. 이 수상이 대면을 청하여 한결같이 공의 말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귀(李貴)에게 명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고 또 팔도에 유시하여 임금이 친히 정벌한다는 뜻을 보였다. 역적 이괄(李适)이 변란을 일으키자 영상(領相) 이 완평(李完平, 이원익)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공을 부관(副官)으로 삼으려고 하니, 조정의 의논이 두 사람이 다 나가서는 안 되므로 공은 조정에 있으면서 책략을 세워 대응하도록 하였다. 적병이 깊이 쳐들어와 도성의 민심이 술렁거리자, 공이 말하기를, “임금이 왕자와 대신으로 하여금 금중(禁中)에 들어가 숙직하게 하여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상황을 진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역적 이제(李瑅)가 변란 초기에 흉계를 부리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송도(松都)가 함락되자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하였으나 도성을 지켜야 할지, 떠나야 할지 결정되지 않았다.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감히 먼저 말하지 않자 공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호흡의 사이에 달려있는데, 어찌 대신이 얼버무리고 있을 때이겠는가? 도성은 지역이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고 강도(江都)는 바다 가운데 있으니, 남쪽 공주(公州)로 내려가 삼남(三南)의 군사를 모집하여 회복을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임금이 곧바로 그 의논을 따랐다. 이괄이 죽자 임금이 공주에 있으면서 백관에게 상을 하사하였다. 공은 체찰(體察)의 노고로 인하여 특별히 자헌 대부의 품계를 환원해주고 도성으로 돌아와 또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승진시켰다. 봄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법에 따라 처리하니, 사람들이 감히 사적인 일로 청탁하지 못하였다.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 민성징(閔聖徵)이 유배된 재상 권진(權縉)을 마음대로 살해하자, 공이 말하기를,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된다.” 하고, 그를 탄핵하였다. 궁노(宮奴)가 횡포를 부리자 공이 그를 가두어놓고 신문하였다. 임금이 그 일은 자전(慈殿)과 관계된 일이라고 하여 사헌부 관리를 체차하라 명하니, 공도 사양하여 체차되고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 세자가 관례(冠禮)와 책봉(冊封)의 예를 행하였다. 공이 원자의 사부(師傅)였으므로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여 우빈객(右賓客)을 겸임하였다. 공이 사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지성으로 세자를 가르쳤으므로 내가 감탄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이조에서 공은 품계가 높아 빈객을 겸임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여전히 유임시키고 싶어서 대신에게 물어본 다음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공이 다섯 번 사헌부의 장을 맡으면서 몸에 네 가지 임무를 겸임하고 새벽에 관아에 들어가 밤에 집으로 돌아가느라 피로가 쌓여 병이 된 바람에 대궐에 나갔다가 갑자기 중풍이 났다. 병환이 위독하자 부인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목욕하고 나서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자리를 반드시 펴놓고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였다. 태학생(太學生)이 학당(學堂)을 비우고 모두 나와 조문하고 경사(卿士)들이 조정을 비우고 나와 곡하였는가 하면 노복 등 미천한 사람들도 너나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의 딸인데,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정원석(鄭元奭)은 문과 출신 현감(縣監)이고, 큰딸은 감찰(監察) 이정철(李廷哲)에게, 둘째 딸은 교리(校理) 나만갑(羅萬甲)에게, 셋째 딸은 유철증(兪哲曾)에게, 넷째 딸은 부솔(副率) 이상질(李尙質)에게 각각 시집갔다. 정원석은 심종민(沈宗敏)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정원(鄭援)을 낳았고, 이정철은 3남 2녀를 낳고, 나만갑은 2남 2녀를 낳고, 유철증은 1남 1녀를 낳고, 이상질은 1남 1녀를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명수(明粹)하고 기국이 준정(峻整)하며 언론이 정대하여 광채가 넘쳐 흘렀으므로 바라볼 때 상서로운 난새와 봉황 같았다. 젊었을 때 영명하고 날카로워 상당히 재기(才氣)를 부렸으나 일찍이 사우(師友)와 종유하며 심적인 측면의 공부를 통렬히 하여 병통을 제거하고 자신을 장중(莊重)하게 가지려고 힘썼다. 특히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ㆍ≪주자전서(朱子全書)≫에 힘을 들여 깊이 함양하고 두텁게 쌓아 조예가 얕지 않았으므로 청미(淸美)가 법도에 합치되고 관엄(寬嚴)이 규도에 들어맞았다.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워 의정공이 몰(歿)하였을 때 예절에 지나칠 정도로 상례(喪禮)를 지키어 3년간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으므로 등의 살이 모두 문드러졌고 눈물 흘린 눈에 종기가 곪았는데, 공의 선친이 부인(夫人)의 꿈속에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실명하게 되었는데도 어찌 구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이 깜짝 놀라 살펴보고 약을 써서 오랫동안 치료한 끝에 낳았다. 모부인이 상례를 지키다가 야위어 생명이 위독하자 공이 눈물을 흘리며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눈이 쌓인 뜰에 엎드려 사흘 밤낮을 끊임없이 우니, 모부인이 감동하여 애써 따른 끝에 소생하였다. 집에 있을 때 일찍 일어나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나서 어머니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으며, 녹봉이나 선물을 모두 모부인에게 드리고 감히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모부인이 늙어서 집안일을 보지 않자 공이 부인과 더불어 몸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봉양하였다. 자매(姉妹)와 자질(子姪)들이 모두 한 방에 모여 재롱을 부려 그 누리는 즐거움이 늙을 때까가지 한결같았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적에 그 성경(誠敬)을 다하고 종족을 대할 적에 친소(親疎)의 차이가 없었다. 자식을 가르칠 적에는 엄하기를 위주로 하고 아랫사람을 접할 적에는 관대하려고 힘썼다. 노복이나 어린아이들이 혹시 옷을 끌어당기며 장난을 쳐도 꾸짖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내외가 분명하였다. 온종일 단정히 앉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잘 인정하지 않았으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정을 쏟고 흉금을 털어놓았다. 성품이 소탈하고 치밀하지 않아 세상일이 의중에 없는 것 같았으나 주군(州郡)을 다스릴 적에 반드시 서리가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게 하였으며, 시무(時務)를 논하여 가한 것을 골라 사업에 시행하였는가 하면 의리의 측면에 있어서는 소견이 고매하여 여러 사람들의 말을 절충하였는데, 과거의 사람들이 제기하지 못한 것을 많이 제기하였다. 의심스러운 법은 중지하고 묵은 송사를 속단하되, 정상을 참작하고 의리를 붙여 고하(高下)가 공평하게 하였다. 항상 관대(寬大)와 완만(緩慢)에 힘써 사람들과 더불어 따지지 않았으나 큰 의논과 큰 시비를 당하였거나 혹시 명예와 절개에 관계되었을 경우에는 꿋꿋하게 벽처럼 서서 만 마리의 소도 만회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누차 환난을 당하였으나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광해의 혼란한 정사 때 자취를 물들이지 않고 어렵게 꿋꿋이 살면서 명철하게 몸을 보존하여 한 시대의 완전한 사람이 되었고 좋은 세상을 만나 진퇴를 바르게 하여 결국 임금의 마음이 기울고 조야(朝野)가 신복하게 되었다. 공도 특별한 예우에 감격하여 충성을 다 쏟아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바가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임금을 도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세도를 만회하려고 하였으니, 만년에 만난 바가 천재일시(千載一時)라고 이를 만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중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아! 나와 공은 머리를 묶을 때부터 사귀어 50년이 되어 가므로 항시 몇 일만 보지 못하면 생각이 났다. 그런데 지금 공의 묘소에 이미 풀이 묵었는데, 나만 쓸쓸하게 인간 세상에 남아서 차마 명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돌아보건대, 나는 공의 지기(知己)가 되었고 비록 공도 나를 지기로 여길 것이니, 공의 일생을 알기로는 의당 나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내 사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인용문2|군자가 지키는 것은 학문으로 채워야 하니, 학문의 힘이 없으면 끝까지 지킨 자가 드물었도다. 오직 공의 지조는 변하거나 막히지 않았으니, 외모는 비록 너그럽고 화평하지만 중심은 확고하였도다. 중년에 참소에 걸려들어 곤궁하게 살다가 더욱더 형통해지니, 외직으로 나가 굽혀 살면서 공황2)(龔黃)처럼 다스렸도다. 먼 변방으로 내쫓겨 적이 급박하게 포위하자, 읽던 책을 덮고 성 위로 올라가 담소하며 물리쳤네. 죄안을 꾸며 장기서린 바닷가에 갇혔으나 더욱 깨끗이 씻겨졌고, 혼란한 광해조에서 용감하게 물러나기를 종일을 기다리지 않았네. 비색하고 태평했던 즈음에 자신을 깨끗이 하여, 출처를 구차스럽게 하지 않고 시종 바르게 하였네. 명철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 의견이 잘 맞았고, 경연(經筵)에서 경계의 말씀을 개진하여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도다. 정성을 다하고 건의하는 등 생각이 민첩하였고, 논한 바가 강직하여 모두 다 원대한 것을 경영하였도다. 혼자 기풍을 견지하여 기강이 엄숙했으며, 교육을 실시해 선비를 육성하여 문화가 찬란하였도다. 학궁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아울러 사헌부의 장관을 맡았으니, 하루라도 공이 없으면 직무가 돌아가지 않았도다. 공은 가는 곳마다 죽을 힘을 다하니, 임금이 공에게 국정을 맡기고자 삼공(三公)으로 우대하려고 하였도다. 하늘이 어찌하여 빨리 앗아가 임금이 탄식하게 하였던가? 죽은 뒤에 높은 관직을 추증하여 진짜로 임명한 것 같았도다. 남긴 상소가 간절하고 은근하여 한 말의 피를 쏟은 것 같았으며, 그에 대해 포상한 어찰(御札)이 찬란하여 일성(日星)처럼 게시되었도다. 은총이 새로워서 죽어도 산 것 같았으며, (주자가 써준)여덟 글자를 지켜 명성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 시를 돌에다 기재하니 더욱더 이름이 드러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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