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임시 수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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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도가 점령당함에 따라 임시 수도로 수도를 잠시 이전하였다.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도가 점령당함에 따라 임시 수도로 수도를 잠시 이전하였다.

== [[대한민국]] ==
== [[대한민국]] ==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대구]]까지 천도한 뒤에, 대구 부근에 전선이 형성되자 [[부산]]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국기|국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선]]에서도 공격을 실시하여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국기|대한민국}}은 1950년 [[서울 수복]]을 했지만 [[1·4 후퇴]]로 다시 뺏기고 다시 [[부산]]으로 천도해야 했지만 1951년 중반 안정적으로 [[서울]] 되찾고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후 [[대전]]등지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912915 충청 60년, 대전일보 60년-⑤6·25 전쟁 중의 대전 천도론 ]</ref> 결국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8월 15일]] 환도하였다. 현재 부산에는 [[임시수도기념관]]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대전]], [[대구]] 수도를 옮겼다.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조선인민군]] [[서울]] 점령하였고, 대구 인근 [[낙동강]]에 전선이 형성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1951년]] [[1·4 후퇴]]로 다시 서울에서 철수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2개월 뒤인 [[1951년]] [[3월 16일]] 서울을 재수복하였고, 이때부터 현재의 [[한반도의 군사분계선|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후 한동안 [[대전]] 등지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912915 충청 60년, 대전일보 60년-⑤ 6·25 전쟁 중의 대전 천도론]</ref> 정전협정이 발효된 후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하였다. 현재 부산에는 [[임시수도기념관]]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참조|평양 전투 (1950년)}}
{{참조|평양 전투 (1950년)}}
* {{국기|대한민국}}{{국기|국제 연합}}군이 [[9월 27일]] [[서울]]을 수복하자,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에서 철수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0월 7일]] {{국기|국제 연합}}군이 38도선을 넘자 본격적으로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대, 기관, 정부 등이 [[평양]]으로 철수하여 [[강계]]를 임시 수도로 결정하였는데 중의 일부 인민군은 [[만주]] [[하얼빈]]이나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을 넘기도 했었다. <ref>[http://www.youtube.com/watch?v=tiwq-2poMZM 한국전쟁 Korean war]</ref> 그러다가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2월 6일]] [[평양]] 수복하였고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는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대한민국 국군]][[국제 연합]]군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인민군]]은 [[평양]]에서 철수를 준비하였다. 서울 수복 3일만인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이 [[38선]]을 넘고, [[10월 7일]]에는 [[국제 연합]]군도 북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 [[국제연합]]군은 [[평양]] 점령하였고, 같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중공군]] [[압록강]]을 건넜다.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 {{국기|미국|1912}}이 38선을 넘자 [[소련]]을 포함해 [[중화인민공화국]]도 북진을 반대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대통령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국기|대한민국}}이 [[평양]]을 점령한 후, [[대한민국]]과 [[미국]]이 [[평양]] 통치권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는데 결국 [[10월 21일]] {{국기|미국|1912}}의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38선 이남에만 [[대한민국]] 통치가 가능할 뿐 [[평양]] 아니라고 판단하여 [[평양]] 미국의 통치권이 되어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였다.<ref> [http://www.youtube.com/embed/9gDmOsNM9sw?feature=player_detailpage 6.25전쟁 북진 (4)] </ref>
*[[대한민국 국군]] [[국제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한미 양국 간에는 [[평양]] 통치권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0월 21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대한민국]] 통치권은 [[38선]] 이북인 [[평양]]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평양]]을 통치하였다.<ref> [http://www.youtube.com/embed/9gDmOsNM9sw?feature=player_detailpage 6.25전쟁 북진 (4)]</ref>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38선]]을 넘자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같은 날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린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평양 철수|평양]](1950.12.4)과 [[흥남 철수|흥남]](1950.12.15-12.24)에서 잇따라 철수했다.
* [[마오쩌둥]]이 10월 4일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전쟁에 개입을 결정하였다. <ref> [http://www.youtube.com/watch?v=9AqDuFooX24 Korean War (한국전쟁) 6/8] </ref>그리하여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은 [[10월 19일]]에 맨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청천강을 넘은 {{국기|국제 연합}}군과 [[10월 25일]]에 [[온정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벌였다<ref> [http://www.youtube.com/watch?v=02zFi_LDk0M 한국전쟁 (3/6)] </ref>.<ref> [http://www.youtube.com/watch?v=6xGUt7RCJpM 한국전쟁 (4/6)] </ref> 하지만 [[11월 27일]]에 터진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의 인해전술로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패한 국제 연합군은 [[흥남 철수]]와 [[평양 철수]]를 실시하면서 {{국기|대한민국}}도 [[12월 4일]]에 [[평양]]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평양]]에서 [[덕천]]으로 도피했다가 [[10월 19일]] 임시수도인 [[강계]] 근처로 몸을 숨겼고, [[김정일]] [[만주]] [[장춘]]으로 피신시켰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 김일성의 패주 행각] 1999.6.27</ref>
* {{국기|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 내전]]을 통해 쫓아낸 {{국기|중화민국}}이 [[한국전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격한다는 우려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또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받은 [[무기]]를 이용하면서 [[유엔군]]에 맞서싸웠다.<ref>[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6465665 EBS다큐멘터리-6.25전쟁]</ref>
* {{국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평양]]에서 [[덕천]]으로 철수하여 잠시 이곳에 머물렀는데 [[10월 19일]] [[덕천]]에서 철수하고 [[강계]] 근처에 머물렀다. [[김정일]] [[만주]] [[장춘]]으로 피신하였다.<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 김일성의 패주 행각] 1999.6.27</ref>


== 주석 ==
== 주석 ==

2014년 10월 22일 (수) 18:17 판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도가 점령당함에 따라 임시 수도로 수도를 잠시 이전하였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대전, 대구로 수도를 옮겼다.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조선인민군서울을 점령하였고, 대구 인근 낙동강에 전선이 형성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1951년 1·4 후퇴로 다시 서울에서 철수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2개월 뒤인 1951년 3월 16일 서울을 재수복하였고, 이때부터 현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후 한동안 대전 등지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1] 정전협정이 발효된 후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하였다. 현재 부산에는 임시수도기념관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국군국제 연합군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인민군평양에서 철수를 준비하였다. 서울 수복 3일만인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38선을 넘고, 10월 7일에는 국제 연합군도 북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국제연합군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같은 날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중공군압록강을 건넜다. 대한민국 국군국제 연합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