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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9일 (화) 16:38 판
황현 黃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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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1856년 1월 18일 조선 전라도 광양군 (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양시) |
사망 | 1910년 9월 7일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구례군 (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구례군) | (54세)
국적 | 조선 대한제국 |
직업 | 유학자, 시인, 문장가, 역사가 |
종교 | 유교(성리학) |
활동기간 | 1883년 ~ 1910년 |
수상 |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
부모 | 황시묵(부) |
친지 | 황의돈(재종질), 황윤석(삼종손녀) |
황현(黃玹, 1855년 음력 12월 11일(양력 1856년 1월 18일) ~ 1910년 9월 7일)은 조선 말기의 선비로 시인, 문장가, 역사가, 우국지사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생애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매천(梅泉)이다. 사학자 황의돈(黃義敦)은 그의 7촌 재종질이다. 그는 전라도 광양 출생으로, 전라도 구례에서 성장했다.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였다.[1]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지내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 체결 16일 후 구례군 자택에서 음독 자살했다[2].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장지연(張志淵)이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에 실렸고, 이는 경남일보 필화 사건의 원인이 됐다.
과거 급제
친척 관계
- 7촌 재종질: 황의돈(黃義敦, 1887년 9월 2일 ~ 1964년 11월 12일, 사학자. 前 문교부 편수관. 불교 신자.)
- 삼종손녀: 황윤석(黃允石, 1929년 ~ 1961년 4월 21일, 법조인.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판사. 사학자 황의돈의 딸.)
사후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구례에 있는 황현의 집터에는 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 매천사, 그리고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이 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