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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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은 이미 부패하여 고질적인 악습이 만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거부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젊고 호전적인 성향의 제후들이 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으며, 소위 [[종교개혁]]이 발발하면서 독일 전역에 반란이 일어나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기독교 세계는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베오그라드]]가, [[지중해]]에서는 [[로도스 섬]]이 오스만 군대의 위협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ref name="Pope Adrian VI">[https://en.wikisource.org/wiki/Catholic_Encyclopedia_(1913)/Pope_Adrian_VI "Pope Adrian VI".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3.]</ref>
:교황청은 이미 부패하여 고질적인 악습이 만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거부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젊고 호전적인 성향의 제후들이 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으며, 소위 [[종교개혁]]이 발발하면서 독일 전역에 반란이 일어나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기독교 세계는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베오그라드]]가, [[지중해]]에서는 [[로도스 섬]]이 오스만 군대의 위협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ref name="Pope Adrian VI">[https://en.wikisource.org/wiki/Catholic_Encyclopedia_(1913)/Pope_Adrian_VI "Pope Adrian VI".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3.]</ref>


하드리아노 6세는 대사 체계의 개선을 시도하는 등 당시 비평을 많이 받았던 [[대사 (가톨릭)|대사]]의 무분별한 남용을 해소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추기경들의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교황 레오 10세 시절인 수년 전부터 소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금을 받고 교회법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혼인 장애(조당)의 해소가 암암리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드리아노 6세는 대사 체계의 개선을 시도하는 등 당시 비평을 많이 받았던 [[대사 (가톨릭)|대사]]의 무분별한 남용을 해소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추기경들의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교황 레오 10세 시절인 수년 전부터 소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금을 받고 혼인 장애(조당)의 해소가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드리아노 6세는 과거에 [[스페인]]에서 일할 때도 말과 풍습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로마]]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하드리아노 6세는 과거에 [[스페인]]에서 일할 때도 말과 풍습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로마]]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2014년 7월 15일 (화) 20:50 판

하드리아노 6세
전임자레오 10세
후임자클레멘스 7세

교황 하드리아노 6세(라틴어: Hadrianus PP. VI, 이탈리아어: Papa Adriano VI)는 제218대 교황(재위: 1522년 1월 9일 - 1523년 9월 14일)이다. 본명은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독일어: Adriaan Florisz d’Edel)이다.

오늘날 네덜란드위트레흐트에 해당하는 신성 로마 제국위트레흐트 교구령에서 태어난 그는 현재까지 유일한 네덜란드인 교황이자 1978년 폴란드 태생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되기 전까지 마지막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었다. 동시에 그는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되기 전까지 마지막 독일인 교황이었다.

초기 생애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있는 하드리아노 5세의 생가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은 1459년 3월 2일 신성 로마 제국부르고뉴령 네덜란드에 속했던 위트레흐트 교구령의 수도인 위트레흐트에서 검소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위트레흐트 태생의 플로렌스 보옌츠이며, 모친은 그의 아내 게르트루이드이다. 아드리안은 시종일관 서명할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위트레흐트의 아드리안’(Adrianus Florentii)이라고 표기하였는데, 그의 집안이 아직 성(姓)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1]

아드리안의 부친은 조선소에서 일하는 목수였는데, 아드리안이 10세 때에 사망하였다.[2] 어린 시절에 아드리안은 즈볼러 또는 데벤터르에서 공동 생활 형제회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즈볼러에 있는 라틴어 학교의 학생이기도 하였다.[3] 1476년 6월 부르고뉴 공작 부인인 요크의 마거릿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그는 루뱅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루뱅

12년 간 공부한 끝에 아드리안은 1491년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490년부터 그는 루뱅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493년에는 루뱅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으며, 1498년에는 루뱅의 성 베드로 성당 참사회장이 되었다. 루뱅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오래 연임한 그는 사실상 영구적인 부총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그의 강의 내용은 그에게 수업받은 제자들에 의해 필기되어 책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아드리안의 제자들 중에는 에라스무스도 있었다. 1502년 에라스무스는 아드리안으로부터 교수직을 맡을 것을 제안받았으나, 사양하였다.[1]

1506년 11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장녀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 공주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통치자로 임명되면서 그녀의 조언자로 아드리안이 선택받았다. 다음해 막시밀리안 1세는 아드리안을 당시 7세 된 자신의 손자이자 마르게리타의 조카인 카를(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개인 지도 교사로 임명하였다.[1] 1512년 카를 5세의 조언자로 임용된 아드리안은 신성 로마 제국 궁정에서의 업무가 바빴기 때문에 교수직을 그만두어야만 했다.[1]

스페인

1515년 카를 5세는 아드리안을 스페인에 있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에게 파견하였다. 페르난도 2세가 다음 후계자로 자신의 어린 동생인 페르니단트를 염두에 두자, 스페인 영토는 자신의 통치 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아드리안은 1516년 1월 페르난도 2세가 서거하기 전에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하였다. 카를 5세는 이에 보답 차원에서 1516년 11월 14일 아드리안을 토르토사의 주교 및 아라곤의 대심문관으로 임명되도록 힘을 썼다. 다음해, 교황 레오 10세는 아드리안을 성 요한과 바오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카를 5세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아드리안 추기경은 프란시스코 히메네즈 데 시스네로스 추기경과 더불어 스페인의 공동 섭정으로 활동하였다. 히메네즈 추기경이 선종한 후에 아드리안은 1518년 3월 14일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대심문관으로 임명되어, 교황으로 선출되어 로마로 떠나기 전까지 역임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네덜란드에 가 있던 카를 5세는 코무네로스의 반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의 교황을 스페인의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교황 선출

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한 후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레오 10세의 사촌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의 교황 클레멘스 7세)이었다. 한동안 교착 상태가 지속되자, 스페인과 프랑스 추기경들이 합십하여 당시 사정상 콘클라베에 불참한 아드리안에게 표를 던지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1522년 1월 9일 아드리안이 거의 만장일치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아드리안은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나 수락하였다. 카를 5세는 자신의 개인 지도 교사였던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뻐했지만, 곧 아드리안이 장차 교황으로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통치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처음에는 아드리안이 카를 5세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고 여겨 교회가 분열을 겪을 수도 있다고 위협하였다가, 나중에 마음이 누그러져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개인 지도 교사 및 섭정으로 지낸 이력 때문에 스페인판 아비뇽 유수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아드리안은 서둘러 이탈리아를 향해 길을 떠났다. 1522년 8월 29일 아드리안은 로마에 당도하였으며, 그의 교황 대관식은 8월 31일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1908년판 가톨릭 백과사전에서는 하드리아노 6세가 즉위할 당시 그가 맞닥트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교황청은 이미 부패하여 고질적인 악습이 만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거부하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젊고 호전적인 성향의 제후들이 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였으며, 소위 종교개혁이 발발하면서 독일 전역에 반란이 일어나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기독교 세계는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헝가리베오그라드가, 지중해에서는 로도스 섬이 오스만 군대의 위협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4]

하드리아노 6세는 대사 체계의 개선을 시도하는 등 당시 비평을 많이 받았던 대사의 무분별한 남용을 해소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추기경들의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는 또한 교황 레오 10세 시절인 수년 전부터 소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금을 받고 혼인 장애(조당)의 해소가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드리아노 6세는 과거에 스페인에서 일할 때도 말과 풍습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로마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어려웠다.

하드리아노 6세의 무덤

하드리아노 6세는 문예 부흥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인문주의자들과 요한 에크, 루이스 비베스의 사상을 일찍이 잘 알고 있었고 에라스무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벨그라드가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자 1522년 성 요한 기사단로도스 섬마저 함락되었다. 교황청은 재정적으로 늘 적자였고 개신교의 세력은 급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었으므로 교회 쇄신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들은 하드리아노 6세의 그러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하드리아노 6세의 쇄신 훈령이 수용되지도 않았다. 하드리아노 6세는 16세기의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교회 개혁을 시도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20개월 만에 선종하였다.

비(非)이탈리아 출신 교황으로선 그를 마지막으로 교황의 자리는 1978년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나올 때까지 456년 동안 내내 오직 이탈리아인에게만 돌아갔다.

주석

  1. Jos Martens, Bio and review of Verweij book at Histoforum Magazine.
  2. Gerard Weel Life and times of Adrian of Utrecht (in Dutch)
  3. Coster. 〈De Latijnse School te Zwolle〉. 《Metamorfoses》. 17, 19쪽. 
  4. "Pope Adrian VI".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3.
전임
레오 10세
제218대 교황
1522년 1월 9일 - 1523년 9월 14일
후임
클레멘스 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