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흥"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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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흥은 권세가 대신 중 한명이다. 무인집정자 [[경대승]]의 후손으로 [[원나라]], [[왜구]] 등을 무찌르고 평장사, 찬성사를 거쳐 수[[문하시중]]에 올라서 [[신돈]]을 축출하려 하다가 실패, 귀양살이를 했다. 이후 [[신돈]]이 제거된 후 [[문하시중]]으로 등용되었다. 그는 권세가 출신이면서도 그래도 청렴했다. 그러나 결국 [[이인임]]에게 무고당해 귀양가서 죽었다.
본관은 청주 부원파(附元派)를 제거하고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초명은 '''경천흥'''(慶千興)이며 그의 아버지는 우대언(右代言) 경사만(慶斯萬)이다. 감찰 장령 등을 거쳐 [[1354년]] ([[고려 공민왕]] 3) 군부판서(軍簿判書) [[1357년]]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가 되었다. 이때 왜구가 빈번히 침입해오고 북방의 정세도 불안정하여 도성(都城) 수축 논의가 일어나자 정세운(鄭世雲) 유숙(柳淑) 등과 함께 백성의 피폐를 이유로 반대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1359년]]에는 [[기철]](奇轍)등 부원파 일당을 숙청한 공로로 일등공신에 봉해졌으며 서북면원수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1364년]] 1월 원이 [[고려]] 왕으로 임명한 [[
==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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