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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년]] [[5월 20일]]~[[1873년]] [[5월 8일]])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로서, 논리학, 윤리학, 정치학, 사회평론 등에 걸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경험주의 인식론과 공리주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치경제사상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공리주의 (철학)|공리주의]]는 대부이자 스승이었던 [[제러미 벤담|벤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여기에 생시몽주의와 낭만주의를 가미해서 나름의 체계로 발전시켰다. 『논리학체계』, 『정치경제학원리』, 『자유론』 등, 전 33권으로 이루어진 전집(''"Collected Works of John Stuart Mill''", University of Toronto Press)이 있고, 그 밖에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면서 집필한 수많은 보고서를 남겼다.
 
== 생애 ==
 
제임스 밀은 1818년에 《[[영국령 인도의 역사]]》를 출판했다. 그 즈음에 열 두 살이 된 존 밀은 스콜라철학의 논리학을 치밀하게 공부하는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들을 원전으로 읽었다. 이듬해에는 정치경제학 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공부했다. 이는 자본, 노동, 토지를 생산의 삼요소로 바라보는 고전경제학의 시각이 밀 부자에 의해 완성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버지 밀은 산책시간을 이용해서 아들 밀에게 정치경제학을 강의했고, 아들은 배운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어 제출하여 교정을 받았는데, 이 원고는 후일 아버지 밀이 출판한 『정치경제학 요론』의 초고가 되었다. 이 책은 리카도 경제학을 충실하게 답습한 교과서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리카도는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로, 소년 존을 자주 집으로 불러서 함께 산책하면서 정치경제학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밀은 아버지의 교육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인용문|그 교수법은 한 사람의 사상가를 양성하기 위해 것으로는 빼어난 고안이었지만, 내 아버지만큼 치밀하고 정력적인 사상가가 시행해야 성공할 수 있는 종류였다. 심지어 그로서도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비록 내가 주제에 강한 흥미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내게도 분명히 가시밭길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애당초 나로서 당장 터득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았는데, 아버지는 그럴 때에 이치에 어긋나게 속상해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방법은 옳았고 성공을 거뒀다. 아버지가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을 내게 가르친 방법만큼 철저했거나 소양을 기르는 데 적합했다고 할 수 있는 과학적 교육은 전례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나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내게 함으로써 내 능력을 활성화하려고 조금 지나칠 정도로 노력하는 일환으로, 아버지는 설명을 먼저 해주지 않고 내가 목전에 봉착한 난점의 어려움을 완전히 느끼게 된 다음에 해줬다. 그리하여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 굉장한 학문에 관해서 당대에 알려진 모든 지식을 정확하게 전수해줬을 뿐만 아니라, 나를 그 분야에 관한 독자적인 사상가로 만들었다. 나는 거의 처음부터 나름대로 생각을 가질 수 있었고, 아버지와 견해가 다를 때도 종종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의견 차이는 사소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또 결국은 아버지의 견해를 표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나중으로 가면서는 때로 내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세부사항에서 의견을 수정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까닭은 단지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사례는 아버지의 완벽한 솔직성과 교수방법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자서전』}}
{{인용문|
그 교수법은 한 사람의 사상가를 양성하기 위해 것으로는 빼어난 고안이었지만, 내 아버지만큼 치밀하고 정력적인 사상가가 시행해야 성공할 수 있는 종류였다. 심지어 그로서도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비록 내가 주제에 강한 흥미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내게도 분명히 가시밭길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애당초 나로서 당장 터득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았는데, 아버지는 그럴 때에 이치에 어긋나게 속상해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방법은 옳았고 성공을 거뒀다. 아버지가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을 내게 가르친 방법만큼 철저했거나 소양을 기르는 데 적합했다고 할 수 있는 과학적 교육은 전례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나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내게 함으로써 내 능력을 활성화하려고 조금 지나칠 정도로 노력하는 일환으로, 아버지는 설명을 먼저 해주지 않고 내가 목전에 봉착한 난점의 어려움을 완전히 느끼게 된 다음에 해줬다. 그리하여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 굉장한 학문에 관해서 당대에 알려진 모든 지식을 정확하게 전수해줬을 뿐만 아니라, 나를 그 분야에 관한 독자적인 사상가로 만들었다. 나는 거의 처음부터 나름대로 생각을 가질 수 있었고, 아버지와 견해가 다를 때도 종종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의견 차이는 사소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또 결국은 아버지의 견해를 표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나중으로 가면서는 때로 내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세부사항에서 의견을 수정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까닭은 단지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사례는 아버지의 완벽한 솔직성과 교수방법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자서전』}}
 
열 네살 때 밀은 [[제러미 벤담]]의 동생 [[사뮤엘 벤담]]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일년을 보냈다. 프랑스 산악지방의 풍경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일생동안 산골 경치를 좋아하도록 이끌었다. 아울러 프랑스 사람들의 활발하고 친근한 생활태도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몽펠리에의 과학대학({{llang|fr|Faculté des Sciences}})에서 화학, 동물학, 논리학 강의를 들었고, 개인교습을 통해 고등수학을 배웠다. 오가는 길에 파리에 들러서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명한 경제학자 [[세이]]의 집에서 며칠 묵기도 했다. 거기서 밀은 자유당의 여러 지도자들을 만났고, 또 생시몽과 같은 파리의 저명인사도 만났다.
 
밀의 교육과정은 베인이 쓴 전기를 통해서 이미 당대에 출판된 바 있는데, 이를 보면 여덟 살에서 열세 살에 이르는 동안에 밀이 『자서전』에 기록한 정도를 능가하는 성취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표현의 자유가 진보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공론의 여과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의견이 진실로 틀렸거나 해롭다면 공론장에서 자연히 틀렸거나 해로운 것으로 판명이 나서 도태되리라는 말이다. 밀은 정부를 전복하려는 기획이나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론일지라도 표현에 사회적 박해나 정치적 탄압이 가해지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 전복이 진실로 필요하다면 전복해야 할 것이고, 살인이 진실로 정당하다면 용인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단, 의견을 공표하는 방식은 대중연설이나 저술이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직접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이것을 일컬어 [[위해원칙]]({{lang|en|harm principle}})이라고 하는데, 예컨대 굶주림에 시달려 흥분한 상태의 군중을 상대로 곡물 도매상을 지목하면서 "여러분이 굶주리는 것은 저런 자들의 착취 때문"이라는 식의 표현은 안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즈]]는 이를 기초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lang|en|clear and present danger}})이라는 기준을 세웠다. 깜깜한 극장에서 장난으로 "불이야!"를 외쳐서 사람들을 공황에 빠뜨리고 다치게 만들 정도의 위험이 거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받아들일지 배척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의견이나 이론도 표현이 가로막히면 안 된다는 원리다.
 
밀의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 영국을 비롯해서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 일본 등,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원리로 받아들여져, 표현의 자유는 시민의 기본권으로서 포괄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울러 『자유론』(''"On Liberty''")은 영어 산문의 고전으로서 영어권 사회의 대학에서 정치학뿐만 아니라 영문학의 교재로도 아직 널리 읽히고 있다. 그의 공론주의는 영국인의 삶의 큰 영향을 끼쳤다. 스코토 옥소니안 헤이글(Scoto Oxonian Hegel)이 세분화하여 공론주의를 완벽하게 정의 할 때까지 그의 이론은 영국 철학자들이 공론주의를 아웃라인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 정체상태 ===
생시몽은 산업노동자들을 찬양했던 프랑스의 이상주의자였다. 생시몽의 분석에서 밝을 미래를 본 밀은 정체상태 역시 행복한 상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인류는 더이상 돈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며 부유하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기 때문이다. 정체상태라는 이론적 모형에서 리카도는 수확체감, 시장철폐, 이윤감소 등을 보았던 반면, 밀은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신학적 주제들을 보았다. 밀이 개량한 공리주의에는 플라톤식 이상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밀은 인간이 당좌차월이나 잔업근무 같은 것보다 존엄, 고결, 정의 같은 가치에 더 관심을 기울일 날이 오기를 갈망했다. 정체상태에 대한 밀은 다음과 같다.
 
“자본과"자본과 부의 정체상태가 끔찍한 상태라는 고전학파의 주장에 나는 공감할 수 없다. 그러한 상태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상황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경쟁이 인간의 정상적 상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서로를 짓밟고 압박하고 밀어내고 유린하는 현재의 세태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상태일 뿐, 산업발달 과도기의 부작용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생시몽과 마르크스가 그랬듯이 밀 역시 인간이 점차 '필요의 단계(realm of necessity)'를 초월하여 그저 생계를 잇기 위한 삶으로부터 인간성의 고취를 위한 삶으로 진보해 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밀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분류:19세기 철학자]]
[[분류:고전 자유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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