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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문공 희단'''(周 文公 姬旦)은 [[주나라]](周)의 정치가로, [[서주 문왕|문왕]](文王)의 아들이자, [[서주 무왕|무왕]](武王)의 동생이다. 성은 ''''''(姬), 이름은 ''''''(旦)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노나라(魯)의 제후가 되었고, 자기 대신 그의 아들이 제후로 봉해졌다. 주로 통칭은 '''주공'''(周公)이라고 불린다.
'''주 문공 희단'''(周 文公 姬旦)은 [[주나라|주]](周)의 정치가로 [[서주 문왕|문왕]](文王)의 아들이자 [[서주 무왕|무왕]](武王)의 동생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아들이 [[노나라|노]](魯)의 제후로 봉해진 이래 노의 시조로서 받들어졌다. 통칭은 '''주공'''('''周公''')이라고 불린다.

형인 무왕의 보좌를 하였고, 그의 어린아들인 성왕을 보좌하고 주나라 건국 이후의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강태공]]과 [[소공 석]](召公奭)과 함께 주의 창업 공신의 한 사람이다.


== 생애 ==
== 생애 ==
형왕(兄王)인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토벌한 공으로, 주의 성립 뒤에 곡부(曲阜)에 봉해져 노공이 되었다. 이때 봉토로 받을 땅이 남아있지 않아서 [[제나라|제]](齊)로부터 땅을 떼어 받았다고 한다. 문공 자신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봉지로 가지 않고 대신 아들인 [[희백금|백금]](伯禽)에게 주어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호경]](鎬京)으로 돌아와 [[주 성왕|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주공이 되었다.
노나라의 시조이다. [[주 문왕]]의 넷째 아들로 주 무왕의 동복 동생이다. 형인 무왕의 보좌를 하였고, 그의 어린아들인 성왕을 보좌하고 주나라 건국 이후의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강태공]]과 [[소공 석]]과 함께 주나라 건국 공신 중에 한 사람이다.

형인 무왕 생존시에는 형을 도와서 [[은나라]] 토벌의 공으로 제후가 되었는데, 문공이 [[노나라]]를 봉토로 받을 때 남은 땅이 없어서, [[제나라]](齊)로부터 땅에 떼어 받아 노나라가 건국되었다고 한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고, 노나라를 통치하기에 무리기에 자신의 봉지를 아들인 [[희백금]](姬伯禽)에게 물려주어 통치하게 하였고, 스스로는 주나라 수도 호경으로 돌아와서는 주 성왕을 보좌하기 위해서 주공이 되었다.
앞서 무왕이 주를 개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위독해졌을 때, 문공은 한탄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으니 무왕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하였다고 한다. 무왕은 일시 병을 회복하는 듯 하다가 결국 사망하고, 무왕의 어린 아들이 성왕으로 즉위하자 형제인 연의 소공 석과 함께 섭정이 되었다.

이 와중에 옛 은의 [[제신]](帝辛)의 아들 [[무경]](武庚)이 문공의 형(문왕의 셋째 아들)인 [[관숙 선]](管叔鮮)과 동생(문왕의 다섯째 아들)인 [[채숙 도]](蔡叔度) 등을 꾀어 문공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삼감의 난|관채의 난]]). 문공은 난을 토벌하고 무경과 관숙 선을 주벌한 뒤, 채숙 도는 그의 아들 [[채중 호|중호]](仲胡)로 교체한 뒤 유배함으로서, 반란을 수습하였다.


7년 뒤 성인이 된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제후의 지위로 돌아간 후, 문공은 지금의 [[낙양]]인 낙읍(雒邑)에 자리를 잡고 주의 부도(副都)를 세웠다.
주나라를 건국한 뒤에 형인 무왕은 병이 얻었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다는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주공은 한탄하며 스스로 제물로 바쳐서 무왕의 병을 완쾌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병은 일시 회복했지만 다시 악화되고 무왕은 승하하였다. 무왕의 승하로, 무왕의 어린 아들인 성왕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아우인 연나라의 소공 석과 함께 섭정이 되었다.


또한 문공은 예학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팔괘의 효(爻)를 창안하여 [[역경]]을 완성했으며 주의 의식과 의례를 정리해 《[[주례 (책)|주례]](周禮)》와 《의례(儀禮)》을 저술했으며, 문공의 시대에서 약 500년이 지난 [[춘추 시대]]의 인물로 [[유학]]을 정립한 [[공자]](孔子)는 노의 수도였던 곡부 출신으로서 문공을 이상적인 성인으로서 꿈에서도 그를 보고 싶어할 정도로 경모하여,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했다(吾不復夢見周公)"고 말하며 "나도 이제 늙어버렸다"고 탄식했다([[논어]] 술이편)고 한다. 현대의 학자들은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주례를 익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에 [[삼감의 난|관채의 난]]이 일어났다. 은나라의 [[제신]](帝辛)의 아들 [[무경]](武庚), 형인 [[관숙 선]](管叔鮮)과 동생인 [[채숙 도]](蔡叔度) 등 이 세 사람은 문공이 주 성왕의 섭정을 하는 것이 불만이 많았고, 무경을 중심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 단은 이 반란을 토벌하였고, 은나라 왕자 무경과 형 관숙 선과 동생 채숙도를 주살하였고, 채숙이 다스린 채나라에 그의 아들인 [[채중 호]]를 채나라의 제후로 옹립하게 하여, 이 반란의 뒷일을 정리하였다.


주공(周公)이라는 칭호는 문공 자신이 주의 옛 땅이었던 기산(岐山)에 봉해진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무왕이 사망한 뒤 문공은 실제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가 뒤에 조카 성왕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다는 설도 있다.
그 뒤 7년이 지나고 주 성왕도 성인이 되자, 성왕에 정권을 이양하여 제후의 지위로 돌아간 후 낙읍(雒邑)에 자리를 잡아 이곳에 주공의 봉지로 삼았다.
또 전설에 따르면, 주공은 예학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전해지며, 팔괘의 효(爻)를 창안하여 [[역경]]을 완성했으며 《[[주례 (책)|주례]](周禮)》와 《의례》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썼다고 하나, 현대의 학자들은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주례(周禮)를 익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문공의 묘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불확실하였으나 2004년에 중국 [[산시 성]](陝西省) 宝鶏市의 주공묘(周公廟) 부근에서 발견된 무덤을 문공의 것으로 보고 있다.
약 500년 후인 춘추 시대에 활동했던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따르면, "나도 많이 늙었구나, 이토록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다니!"(子曰 甚矣吾衰也久矣吾不復夢見周公)라고 말할 정도로 주공을 숭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주공의 후예 ==
== 주공의 후예 ==

2014년 4월 20일 (일) 01:42 판

주 문공 희단(周 文公 姬旦)은 (周)의 정치가로 문왕(文王)의 아들이자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아들이 (魯)의 제후로 봉해진 이래 노의 시조로서 받들어졌다. 통칭은 주공(周公)이라고 불린다.

형인 무왕의 보좌를 하였고, 그의 어린아들인 성왕을 보좌하고 주나라 건국 이후의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강태공소공 석(召公奭)과 함께 주의 창업 공신의 한 사람이다.

생애

형왕(兄王)인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토벌한 공으로, 주의 성립 뒤에 곡부(曲阜)에 봉해져 노공이 되었다. 이때 봉토로 받을 땅이 남아있지 않아서 (齊)로부터 땅을 떼어 받았다고 한다. 문공 자신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봉지로 가지 않고 대신 아들인 백금(伯禽)에게 주어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호경(鎬京)으로 돌아와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주공이 되었다.

앞서 무왕이 주를 개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위독해졌을 때, 문공은 한탄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으니 무왕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하였다고 한다. 무왕은 일시 병을 회복하는 듯 하다가 결국 사망하고, 무왕의 어린 아들이 성왕으로 즉위하자 형제인 연의 소공 석과 함께 섭정이 되었다.

이 와중에 옛 은의 제신(帝辛)의 아들 무경(武庚)이 문공의 형(문왕의 셋째 아들)인 관숙 선(管叔鮮)과 동생(문왕의 다섯째 아들)인 채숙 도(蔡叔度) 등을 꾀어 문공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관채의 난). 문공은 난을 토벌하고 무경과 관숙 선을 주벌한 뒤, 채숙 도는 그의 아들 중호(仲胡)로 교체한 뒤 유배함으로서, 반란을 수습하였다.

7년 뒤 성인이 된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제후의 지위로 돌아간 후, 문공은 지금의 낙양인 낙읍(雒邑)에 자리를 잡고 주의 부도(副都)를 세웠다.

또한 문공은 예학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팔괘의 효(爻)를 창안하여 역경을 완성했으며 주의 의식과 의례를 정리해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을 저술했으며, 문공의 시대에서 약 500년이 지난 춘추 시대의 인물로 유학을 정립한 공자(孔子)는 노의 수도였던 곡부 출신으로서 문공을 이상적인 성인으로서 꿈에서도 그를 보고 싶어할 정도로 경모하여,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했다(吾不復夢見周公)"고 말하며 "나도 이제 늙어버렸다"고 탄식했다(논어 술이편)고 한다. 현대의 학자들은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주례를 익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주공(周公)이라는 칭호는 문공 자신이 주의 옛 땅이었던 기산(岐山)에 봉해진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무왕이 사망한 뒤 문공은 실제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가 뒤에 조카 성왕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다는 설도 있다.

문공의 묘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불확실하였으나 2004년에 중국 산시 성(陝西省) 宝鶏市의 주공묘(周公廟) 부근에서 발견된 무덤을 문공의 것으로 보고 있다.

주공의 후예

주공의 맏아들 노후 백금은 노나라의 제후가 되었고, 차남 군진은 주나라에 남아 경사를 세습했다. 이외에도 범 · 형 · 모 · · 채 등의 제후국이 주공의 계통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