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 (168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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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3일 (목) 09:25 판

이재(李縡, 1680년~1746년)은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한천(寒泉)이다.

김창협의 문인이다. 여흥부원군 민유중의 외손자이며 민진후, 민진원, 인현왕후의 친조카이고, 오두인의 사위이다. 작은 어머니인 안동 김씨는 김수흥의 딸이며, 아내 해주 오씨는 김창협의 사위인 오진주의 누이이기도 하다. 숙종의 처조카이자 노론을 대표하는 핵심인물들의 가까운 친인척으로써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숙종 28년(1702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며, 《단종실록(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숙종 42년에 승지에 이르러 ‘가례원류(家禮源流)’시비가 일어나자 노론 측에 가담하여 소론을 통박했고, 숙종 45년 영남균전사(嶺南均田使)로 나가 토지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직후 관직을 버리고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심하다가 영조 1년에 이조참판을 지냈다. 영조 17년에는 예문관 제학, 영조 19년에는 우참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조선 후기 성리학계의 대가로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에 있어 이간의 학설을 지지하여, 한원진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 낙론(洛論)의 대표적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낙론을 지지하면서도 유기설(唯氣說)에는 반대하고, “마음을 말함에 기(氣)만을 가지고 단언할 수는 없으며 기가 이보다 승(勝)하면 난(亂)하고 이가 기보다 승하면 치(治)하니” 성현의 말씀의 진실은 ‘이위기주(理爲氣主)’의 네 글자밖에 없다고 하였다. 즉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이 독단에 빠질 위험성을 경고하고, 율곡의 본의에 따라 온건론을 취하고 주리파와의 절충·타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산정(刪定)했으며, 저서로 《도암집(陶庵集)》, 편서(編書)로 《근사심원(近思尋源)》,《존양록(尊攘錄)》, 《주자어류초절(朱子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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