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곤 (191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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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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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제목 =
|이름 = 사동궁 사손 이곤 <br> 寺洞宮 嗣孫 李錕
|본명 = 이명길
|출생일 = [[1919년]]
|출생지 = {{국기나라|일본 제국}} 조선 [[경성]]
|사망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사망일 = [[1984년]]
|사망원인 = 교통사고
|매장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거주지 = {{국기나라|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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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사동궁 사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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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황경생(黃庚生)
|자녀 = 1남 황손 이수, 2남 [[이준 (1961년)|황손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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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의친왕|의왕 이강]](義王 李堈), 어머니 수인당 김씨(김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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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손 이곤'''(李錕, [[1919년]] ~ [[1984년]])은 대한 황실의 어른이고 [[대한제국]]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광무제]](光武皇帝)의 손자이며, 황자 친왕(親王) [[의친왕|의왕 이강]](義王 李堈)의 6남으로 [[사동궁]](寺洞宮, 의왕의 사택이며 의왕부(義王府) 관청)의 사자(嗣子, 상속자)이시다.
'''황손 이곤'''(李錕, [[1919년]] ~ [[1984년]])은 대한 황실의 어른이고 [[대한제국]]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광무제]](光武皇帝)의 손자이며, 황자 친왕(親王) [[의친왕|의왕 이강]](義王 李堈)의 6남으로 [[사동궁]](寺洞宮, 의왕의 사택이며 의왕부(義王府) 관청)의 사자(嗣子, 상속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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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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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19년 태어남]]
[[분류:1919년 태어남]]

2014년 3월 11일 (화) 09:34 판

사동궁 사손 이곤
寺洞宮 嗣孫 李錕
사손(嗣孫)
전임 이건(李鍵)
후임 황손 이준(李준)
이름
이명길
별호 사동궁 사손
신상정보
출생일 1919년
출생지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조선 경성
사망일 1984년
사망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가문 사동궁 의친왕가
사동궁 오얏꽃 문장
배우자 황경생(黃庚生)
자녀 1남 황손 이수, 2남 황손 이준
묘소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황손 이곤(李錕, 1919년 ~ 1984년)은 대한 황실의 어른이고 대한제국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광무제(光武皇帝)의 손자이며, 황자 친왕(親王) 의왕 이강(義王 李堈)의 6남으로 사동궁(寺洞宮, 의왕의 사택이며 의왕부(義王府) 관청)의 사자(嗣子, 상속자)이시다.

생애

  • 1919년한성부(현재 서울)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 손위 황손들이 모두 출계하였기 때문에 사동궁(寺洞宮, 의왕부)의 사손(嗣孫, 상속자)이 되었다.
  • 1953년에 국유재산이 된 구왕궁재산 700만환에 해당하는 건물과 토지를 불법매각한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3년이 구형되었으나, 범죄의 동기가 생활난이고, 6.25 사변 이전에는 국가에서 보조금을 주었으나 그 이후로는 주지 못한 사실 등에 비추어 정상참작하여 2년 징역에 5년 집행유예가 언도되었다.[1]
  • 1964년에 황호현 의원의 알선으로 국회사무처직원(경비직)으로 취직하였다.
  • 1968년영휘원(永徽園) 문화재관리국 임시직원(산림보호직) 한경숙씨(韓景淑氏, 47세)가 "왕족이면 다냐, 나가자"라는 폭언과 함께 황손(皇孫 李錕, 57세)의 집(영휘원 재실)의 기물을 부수기도 하고, 황손을 영휘원 사무실에서 폭행하여 전치 4주의 중상을 입혔다며 황손이 한씨(韓氏)를 고소하였고, 한씨도 황손에게 맞아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맞고소를 제기하여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둘이 함께 입건되었다. 황손은 덕수궁에서 살아오다가 1962년 덕수궁 개축 때 집이 헐려 서울 청량2동 205번지 홍릉 옆에 있는 영휘원(永徽園, 순헌 황귀비 엄씨의 묘소) 재실로 거처를 옮겨 매년 임대료 2250 원을 물고 살아왔다.[2]
  • 1969년 4월 23일에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미관상의 이유로 황손의 청량2동의 집을 철거하였다. 문화재관리국은 철거하기 전에 7번이나 경고장을 보냈으나 황손은 돈이 없어 옮기지 못하다가 집이 철거당하게 된 것이다.[3]
  • 국회사무처직원을 퇴직한 이후로는 아내 황경생(黃庚生)씨가 보험외판원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겨우 꾸려갔다.
  • 1984년에 교통사고로 성바오로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뇌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사망하였다.

황실 가계

출처

  1. “전락의 왕손갱생의 출감”. 경향신문. 1953년 7월 22일. 
  2. “갈 곳 없는 왕가의 후예”. 경향신문. 1968년 6월 6일. 
  3. “의친왕 아들 곤씨 가족 길가에”. 경향신문. 1969년 4월 24일. 
전임
이건(李鍵)
제2(3)대 사동궁 사자(의친왕 종손)
?년 ~ 1984년
후임
황손 이준(李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