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쿠라 사절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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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Iwakura mission.jpg|thumb|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
[[그림:Iwakura mission.jpg|thumb|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 혹은 '''암창 사절단'''은 1871년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 과도정부가 파견한 해외 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덱]]이 [[러시아]]의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가 서유럽으로 보낸 [[대사절단]]에 착안하여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메이지 유신 전에 도쿠가와 쇼군에서도 미국에 한 차례(1860년), 유럽에 차례(1862년과 1863년) 사절단을 보낸 바 있었다. 특명전권대사인 [[이와쿠라 토모미]]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 사절단이라고 부른다.
'''이와쿠라사세츠단'''[{{ja-y|岩倉使節団|いわくらしせつだん}}] 혹은 '''암창사절단'''은 메이지 4년 11월 12일인 1871년 12월 23일에서 메이지 6년인 1873년 9월 13일까지, 일본 [[과도정부]] 사절단으로서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덱]]이 [[러시아]]의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가 [[서유럽|西歐]](서구)로 보낸 [[대사절단]]에 착안하여 제안하였다고 알려졌다.{{출처}} [[메이지 유신|메이지이신]] 전에 [[에도 막부|江戶幕府]](에도바쿠후)에서도 1860년에 [[미국|米合衆國]](미합중국)에 한 차례, 1862년과 1863년에 [[유럽|歐洲]](구주)에 두 차례 사절단을 보낸 바 있었다. [[특명전권대사]]인 [[이와쿠라 토모미]]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세츠단이라고 부른다.


==일행==
==일행==
[[그림:IwakuraMissionPresidentThiers1873.JPG|thumb|프랑스 대통령을 만나는 이와쿠라 사절단]]
[[그림:IwakuraMissionPresidentThiers1873.JPG|thumb|프랑스 대통령을 만나는 이와쿠라사세츠단]]
[[이와쿠라 도모미]]와 그를 돕는 세 명의 부대사가 동행하였다. 부대사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로 당시 정권의 장관들이었다. 이와 행정가들과 학자들도 대동하였는데 그 총수는 48명이었다. 그리고 60명의 유학생들을 함께 데려갔는데 그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귀국하여 일본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와 그 사람을 돕는 副[[특명전권대사]]명이 동행하였다. 副[[특명전권대사]]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로 당시 정권의 장관이었다. 이와 행정가들과 학자들도 대동하였는데 그 총수는 48명이었고 함께 데려간 유학생 60명은 [[미국|米合衆國]](미합중국)과 [[유럽|歐洲]](구주)에서 유학하고 나서 귀국하여 일본을 지도하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여정==
==여정==
그들은 1871년 9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다. 그 곳에서 [[워싱턴 디시]]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였다. 1873년 10월 13일 귀국하여 거의 2년 동안 여행하였다.
그 사람들은 1871년 9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다. 그곳에서 [[워싱턴 디시]]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였다. 1873년 10월 13일 귀국하여 거의 2년간 여행하였다.


==임무==
==임무==
그들의 첫째 임무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여러나라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에 대하여 재협상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둘째 임무는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 구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첫째 임무는 대단히 수행하기가 어려서 상대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늘어났지만, 둘째 임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사람들의 첫째 임무는 [[미국|米合衆國]](미합중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歐洲|(구주)諸國(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재협상하는 일이었고 둘째 임무는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구조 정보를 蒐集(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은 첫째 임무는 대단히 수행하기가 어려서 상대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늘어났지만, 둘째 임무는 성공했다고 할 만하다.


==사절단의 느낌==
==사절단의 感懷(감회)==
이 여행 중에 이와쿠라는 각국에서 격렬한 쇼크를 받았다. 미국의 근대국가의 모습은 이와쿠라의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산조에게 전한 서신에도 ‘은부(殷富)를 진흥시키는 사상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 라고 적혀있다. 그 원인은 [[철도]]에 있고, 일본의 번영은 철도에 걸려있어 일본의 동서를 잇는 철도 설치가 급선무가 되었다. 이와쿠라가 귀국 [[일본 철도|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영국에서는 일본에서 생각할 수 없는 공업기술에 압도되었다. 이미 사절단은 조약 개정이 아닌 각국에서의 유학이 주요목적이 되었다.
이 여행 중에 이와쿠라는 각국에서 격렬히 충격받았다. [[미국|米合衆國]](미합중국)의 근대국가다운 모습은 이와쿠라의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충격스러워서 산조에게 전한 서신에도 殷富(은부)를 진흥시키는 사상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라고 적혀 있다. 그 원인은 [[철도]]에 있고 일본의 번영은 철도에 걸려 있어 일본의 동서를 잇는 철도 설치가 급선무가 되었으므로, 이와쿠라는 귀국하고서 [[일본 철도|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으로 관여했으며, 영국에서는 일본에서 생각할 수 없는 공업 기술에 압도되었다. 이미 사절단은 조약 개정이 아닌 각국에서의 유학이 주요 목적이 되었다.


덧붙여 이와쿠라는 여태까지 상투는 일본인의 혼이라고 생각하여, 자르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 때문에 미국을 방문할 시에도 일본식 상투를 하였지만, 미국에 유학을 자식인 [[이와쿠라 도모사다]]에게 설득되어, 시카고에서 잘랐다고 한다.
덧붙여 이와쿠라는 여태까지 상투는 일본인의 혼이라고 생각하여 자르기를 거절해서 [[미국|米合衆國]](미합중국)을 방문할 때도 일본식 상투를 하였지만, [[미국|米合衆國]](미합중국)에 유학한 자식인 [[이와쿠라 도모사다]]에게 설득되어 시카고에서 잘랐다.{{출처}}


==언역==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1권: 미국』,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2권: 영국』,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3권: 유럽 대륙(상)』,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4권: 유럽 대륙(중)』,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5권: 유럽 대륙(하)』,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 각주 ==
<references/>


{{토막글|일본}}
{{토막글|일본}}

2013년 8월 30일 (금) 02:04 판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부

이와쿠라사세츠단[[[:틀:Ja-y]]] 혹은 암창사절단은 메이지 4년 11월 12일인 1871년 12월 23일에서 메이지 6년인 1873년 9월 13일까지, 일본 과도정부 사절단으로서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덱러시아표트르 대제西歐(서구)로 보낸 대사절단에 착안하여 제안하였다고 알려졌다.[출처 필요] 메이지이신 전에 江戶幕府(에도바쿠후)에서도 1860년에 米合衆國(미합중국)에 한 차례, 1862년과 1863년에 歐洲(구주)에 두 차례 사절단을 보낸 바 있었다. 특명전권대사이와쿠라 토모미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세츠단이라고 부른다.

일행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는 이와쿠라사세츠단

이와쿠라 도모미와 그 사람을 돕는 副특명전권대사 세 명이 동행하였다. 副특명전권대사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로 당시 정권의 장관이었다. 이와 행정가들과 학자들도 대동하였는데 그 총수는 48명이었고 함께 데려간 유학생 60명은 米合衆國(미합중국)과 歐洲(구주)에서 유학하고 나서 귀국하여 일본을 지도하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여정

그 사람들은 1871년 9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다. 그곳에서 워싱턴 디시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였다. 1873년 10월 13일 귀국하여 거의 2년간 여행하였다.

임무

그 사람들의 첫째 임무는 米合衆國(미합중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歐洲|(구주)의 諸國(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재협상하는 일이었고 둘째 임무는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구조 정보를 蒐集(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은 첫째 임무는 대단히 수행하기가 어려서 상대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늘어났지만, 둘째 임무는 성공했다고 할 만하다.

사절단의 感懷(감회)

이 여행 중에 이와쿠라는 각국에서 격렬히 충격받았다. 米合衆國(미합중국)의 근대국가다운 모습은 이와쿠라의 사상을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충격스러워서 산조에게 전한 서신에도 ‘殷富(은부)를 진흥시키는 사상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라고 적혀 있다. 그 원인은 철도에 있고 일본의 번영은 철도에 걸려 있어 일본의 동서를 잇는 철도 설치가 급선무가 되었으므로, 이와쿠라는 귀국하고서 일본 철도 회사 설립에 적극으로 관여했으며, 영국에서는 일본에서 생각할 수 없는 공업 기술에 압도되었다. 이미 사절단은 조약 개정이 아닌 각국에서의 유학이 주요 목적이 되었다.

덧붙여 이와쿠라는 여태까지 상투는 일본인의 혼이라고 생각하여 자르기를 거절해서 米合衆國(미합중국)을 방문할 때도 일본식 상투를 하였지만, 米合衆國(미합중국)에 유학한 자식인 이와쿠라 도모사다에게 설득되어 시카고에서 잘랐다.[출처 필요]

언역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1권: 미국』,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2권: 영국』,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3권: 유럽 대륙(상)』,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4권: 유럽 대륙(중)』,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제5권: 유럽 대륙(하)』, 著 구메 구니타게, 譯 정애영, 소명출판, 2011년 12월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