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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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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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3일 (목) 21:10 판

고려-거란 전쟁
날짜993년~1019년
장소
한반도 북부
결과 고려의 승리
교전국
고려 요나라
지휘관
고려 성종
고려 현종
서희
강감찬
강조
양규
김숙흥
요 성종
소손녕
소배압
병력
208,000명 (1019년) 50,000 (993년, 실제론 알 수 없음)
400,000 (1010년)
100,000명 (1019년)
피해 규모
알 수 없음 90,000여명 이상 추정(1019년)

고려-거란 전쟁993년, 1010년, 1019년고려거란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遼)를 건국하였다. 922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의 태조는 거란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북진 정책을 실행하였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하여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발해 유민이 압록강가에 세운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 진화(振化), 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성종 12년) 10월 요나라소손녕(蕭遜寧)이 6만 대군(80만은 허위 사실. 실제론 5만~6만의 군대)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朴良柔)와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는 한편, 성종(成宗)이 친히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으며, 조정에서는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함께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등의 주장이 난무하였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으나, 서희와 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는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대국(여기서는 자신의 국가인 거란을 말한다.)이 와서 치는 것이다. 지금 땅을 떼어 우리에게 바치고 사신을 보내 조빙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1]

이에 대해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던 것이다. 만약 다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여기서는 거란을 말한다.)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이다.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하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은 우리나라 땅이지만 여진이 점거하였다. 이들이 교활하고 변덕이 많아 길을 막아서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조빙을 못하게 됨은 여진 탓이다.[2]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 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으며 강제 출가한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의 실제적인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재차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고려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귀주대첩

강감찬은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전쟁 결과

1019년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이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요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도 서북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도 힘들어졌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았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118.216.126.136 (토론) 2013년 6월 13일 (목) 21:10 (KST)8yttyiiuj75m fy 376y546i== 주석 ==

  1. 고려사절요》 권(券) 2, 성종 문의대왕 (成宗文懿大王)
  2. 고려사절요》권(券) 2, 성종 문의대왕 (成宗文懿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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