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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탄'''(韋誕)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의 서예가로, [[자 (이름)|자]]는 '''중장'''(仲將)이며 사례(司隷) 경조윤(京兆尹)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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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적 ==
== 행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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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삼국지 위나라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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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나라의 서예가]]
[[분류:한나라의 서예가]]

2013년 3월 20일 (수) 20:14 판

위탄(韋誕,179년 ~ 253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의 서예가로, 중장(仲將)이며 사례(司隷) 경조윤(京兆尹) 사람이다.

행적

건안(建安) 연간에 상계리(上計吏)를 지냈고, 특별히 낭중(郞中)에 올랐다. 태화(太和) 연간에는 무도태수(武都太守)[1]에 임명되었으나, 글에 능했으므로 부임하지 않고 조정에 남아서 시중(侍中)이 되었다. 이후 중서감(中書監)이 되었고,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다가 은퇴하여 75세에 죽었다.[2]

서예

한단순(邯鄲淳) · 위기(衛覬)와 함께 서예에 능해 이름을 날렸다. 위기의 손자 위항에 따르면, 전서는 한단순에게서 배웠으나 그에 미치지는 못했다. 초서에 대해서는 장백영(張伯英)[3]을 초성(草聖)이라 일컬었고, 또 강맹영(姜孟穎)[4] · 양공달(梁孔達)[5] · 전언화(田彦和)와 함께 장백영에게 배워 당대에 명성이 있었으나, 장백영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은 아우 장문서(張文舒)[6]에는 미치지 못했다.[2]

친척 관계

  • 위단 (아버지)

주석

  1. 당시 무도군은 촉한(蜀漢)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2. 《문장서록》 (진수, 《삼국지》 권21 왕위이유부전에 주석으로 인용
  3. 장지(張芝).
  4. 강후(姜詡).
  5. 양선(梁宣).
  6. 장창(張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