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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18/소수림왕|본기 권18 소수림왕]] |인용문=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ref> [[광개토대왕]] 때는,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18/광개토왕|본기 권18 광개토왕]] |인용문=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ref>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ref>염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 시라무렌강 상류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ref>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ref>서영수, 〈廣開土王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歷史學報》 119, 1988. 다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 〈고구려의 北方進出과 廣開土王碑文〉,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년》, 高句麗硏究會, 1996</ref>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이후에는 대체로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서요]]는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18/소수림왕|본기 권18 소수림왕]] |인용문=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ref> [[광개토대왕]] 때는,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18/광개토왕|본기 권18 광개토왕]] |인용문=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ref>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ref>염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 시라무렌강 상류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ref>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의 [[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ref>서영수, 〈廣開土王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歷史學報》 119, 1988. 다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 〈고구려의 北方進出과 廣開土王碑文〉,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년》, 高句麗硏究會, 1996</ref>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이후에는 대체로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서요]]는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 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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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현조(遼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요 현조(遼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요 덕조(遼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적노]](耶律的魯)
** 요 덕조(遼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적노]](耶律的魯)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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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Кідані]]

2013년 3월 15일 (금) 08:27 판

거란(契丹) 또는 키탄(Khitan)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이다. 일단 언어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땐 몽골계에 가깝다. 자신들이 사용한 명칭은 '키탄'이며, '키타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란식 이름이다. 지금은 사라진 민족이며,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다우르족(達斡爾族, Daur)이 거란족의 후예로 추정된다.

일찍이 378년 가을 9월에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는 등 노략질하였으나, 고구려는 거란의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1] 광개토대왕 때는,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는다.(392년 9월) [2] 395년 고구려는 염수(鹽水)[3]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6~700영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거란 정벌(392년)과 광개토왕릉비비려 정벌(395년)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4] 거란은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일부가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되었다.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대거란를 세우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여진족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이후에는 대체로 한족몽골족에 동화되었고, 서요는 중앙아시아로 옮겨갔다.

어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뜻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Хятад, Hyatad)' 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하며, 거란인들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은 '키탄(Khitan)'으로 추정된다. 13세기 이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거란의 군주

  • 요 태조 추숭 황제
    • 요 숙조(遼肅祖) 소열황제(昭烈皇帝) 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
    • 요 의조(遼懿祖) 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 요 현조(遼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요 덕조(遼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적노(耶律的魯)

주석

  1.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2. 김부식 (1145). 〈본기 권18 광개토왕〉. 《삼국사기》.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3. 염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으며, 시라무렌강 상류의 염호인 광제호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4. 서영수, 〈廣開土王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 《歷史學報》 119, 1988. 다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 〈고구려의 北方進出과 廣開土王碑文〉, 《廣開土好太王碑硏究 100년》, 高句麗硏究會, 1996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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