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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용 전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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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칼름은 영국군의 역공을 염려하고 있었고, 또, 긴 하루를 싸운 부대원들도 피로가 쌓여있었기 때문에, 여러 통의 맥주와 와인을 전선으로 보냈다. 병사들은 졸음과 공격에 대한 방어 업무를 하며, 불안하게 밤을 새웠다.
 
루이스버그 함락 소식 직후에 곧 전투 결과가 본토에 전해졌다. 루이스버그 승리의 기운에 찬물을 끼얹는 소식이었다. 피트가 뉴프랑스의 정복을 완수한 핵심 작전인 뒤크슨 요새와 프론테냑 요새의 승리를 알고 나서야, 1758년의 얻은 영국군의 승리는 연말에 본국에 전달되었다. 만약 카리용 요새가 1758년에 함락되었더라면, 뉴프랑스는 1758년 또는 1759년에 영국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이 때 카리용 요새가 사수되었기 때문에, 몬트리올(마지막 프랑스의 저항 거점)의 항복은 오스웨고 요새와 쿼벡 요새 그리고 카리용 요새에 대가 점령된 1760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루이스버그의 승리자인 [[제프리 애머스트의애머스트]]의 명령으로 1759년 함락된 후 카리용 요새는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이름을 바꿨다.
 
에버크롬비는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지휘관 경력을 접어야 했다. 조지 호수에서는 그나마 의욕이 있었지만, 7월 13일 전쟁위원회에서 결정된 존 블래드 스트리트가 지휘한 성공적인 프론테냑 요새 공략과 같은 전투에서 지원하는 이상의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브래드 스트리트는 7월 23일 3,000명의 병력과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에버크롬비는 인력부족의 핑계를 들어 그 전투에 지원을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