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삼국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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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王平, [[155년]] ~ [[248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자는 자균(子均)이고 파서 탕거 사람이다.
'''왕평'''(王平, [[155년]] ~ [[248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자는 '''자균'''(子均)이고 파서 탕거 사람이다.


== 생애 ==
== 생애 ==

2013년 2월 24일 (일) 11:20 판

왕평(王平, 155년 ~ 248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로, 자는 자균(子均)이고 파서 탕거 사람이다.

생애

원래는 조조(曹操)의 섬겼으나, 한중 전투 이후 유비(劉備)를 섬긴다.

228년 마속(馬謖)을 따라 가정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마속이 제멋대로 행동해 산에 진을 치자 여러 번 간했으나 마속은 말을 듣지 않아 장합(張郃)에게 패배한다. 이때 왕평 휘하의 군사 1천만이 북을 울리고 자리를 지키자 장합이 접근하지 못해 왕평은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돌아왔다. 이에 제갈량(諸葛亮)이 왕평을 치하하며 참군(參軍),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오부(五部)를 통솔하게 했다.

231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했을 때 따로 남쪽을 지켰으며, 장합이 공격해왔으나 굳게 수비해 막아냈다.

234년 제갈량이 죽고 양의(楊儀)가 군을 인솔해 퇴각하나 양의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魏延)이 명을 위반하고 난을 일으킨다. 왕평이 선봉에 나서 위연과 병사들을 꾸짖자 그의 병사들이 두려움을 떨어 뿔뿔이 흩어져 위연의 난은 쉽게 진압당하게 된다. 제갈량 사후 후전군(後典軍), 안한장군(安漢將軍)에 봉해져 오의(吳懿)의 부장이 되어 한중을 지키고, 237년 안한후(安漢侯)가 되어 오의 사후 한중을 지켰고 243년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에 임명된다.

244년 위의 대장군 조상(曹爽)이 10여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침공해오자 다른 이들이 후퇴해서 수비하자고 주장했으나 왕평은 이에 반박하고 호군(護軍) 유민(劉敏)과 함께 1천명의 군사로 흥세산(興勢山)에서 비의(費禕)의 지원이 올때까지 위군을 저지해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왕평전에 의하면 「오랫동안 전쟁에 있었기 때문에 문장이 쓰지 못하고, 알고 있는 글자는 10자에 못 미쳤지만, 구술 필기시킨 문장은 조리가 있었다고 한다.「사기」·「한서」를 다른 사람에게 읽게 해 그 내용을 논하고 요지를 파악했다. 법률을 충실히 이행하고, 농담하지 않고, 종일 단좌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무장으로써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략) 왕평은 충용하고 엄정한 인물이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248년, 94세의 나이에 병사하였고, 적자 왕훈이 그의 뒤를 이었다.

삼국지 연의에서의 왕평

유비가 한중을 공격할 때, 서황의 부장으로 참전했다. 서황은 물을 건너서 싸우자고 했으나 왕평은 반대했다. 결국 서황은 황충조운에게 패베했다. 그러나 서황은 지원을 하러 오지 않은 왕평을 꾸짖어 이에 앙심을 품은 왕평은 진채에 불을 지른 뒤, 조운에게 찾아가 유비에게 항복하겠다고 하고 편장군이 되었다. 그 후 제갈량의 북벌 때 마대(馬岱), 장익(張翼), 강유(姜維), 요화(廖化), 마충, 위연(魏延) 등과 함께 크게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