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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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의 승려인 일연(一然)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1]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2] 2003년에 조선 초기의 간행본과 중종 임신본이 각각 대한민국의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되었다.

내용

삼국유사에는 삼국과 가락국(駕洛國 : 가야)의 왕대와 연대,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 국가의 흥폐·신화·전설·신앙 및 역사, 불교에 관한 기록, 고승들에 대한 설화, 밀교(密敎) 승려들에 대한 행적, 고승들의 행정, 효행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모든 설화는 삼국 시대의 것이지만, 유동하던 이야기가 고려 시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흘러다니던 설화의 내용이 일연이라는 개인에 의해 작품화된 셈이므로 고려의 설화문학으로 취급될 수 있다.[3]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의 주제는 주로 신라와 불교를 중심으로 편찬되어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삼국사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이두(吏讀)로 쓰인 향가(鄕歌) 14수가 기록되어 있어 국어 국문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향가는 《균여전(均如傳)》에만 11수(首)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전적에는 전혀 전하지 않기 때문에 향가 연구에서 삼국유사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또한 《제왕운기》와 더불어 단군 신화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으로 고려 후기, 대몽항쟁 과정에서 급부상한 단군 신앙과 동족 의식을 반영한다.[5]

구성

전체 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나뉘어 있다. 권수는 편목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분량에 따라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제일(第一)이 붙어 있는 것이 왕력과 기이 두 편인 바, 왕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1. 권1 왕력(王曆) 제1 : 간략한 제왕의 연대기로 중국 역대 왕조를 기준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를 대상으로 하여 기원전 57년부터 936년 고려 태조에 의한 후삼국시대의 통일기까지를 시간적 폭으로 한 연대표이다.
  2. 권1 기이(紀異) 제1 :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칠십이국, 낙랑군,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오가야, 부여, 이서국, 고구려, 백제 등 고조선으로부터 남북국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총 36조로 이루어져 있다.
  3. 권2 기이(紀異) 제2 : 통일신라의 출현과 이후 역대왕들 그리고 기타 등등을 다루고 있으며 총 24조. 고조선에서 고려 건국 이전까지 존재했던 여러 국가와 여러 왕(특히 신라왕)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4. 권3 흥법(興法) 제3 : 삼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고 흥성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총 8조.
  5. 권3 탑상(塔像) 제4 : 불교의 흥성에 따라 삼국(특히 신라)에 주목할만한 사탑이나 불상을 조성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총 29조.
  6. 권4 의해(義解) 제5 : 신라의 고승들이 보여주었던 뛰어난 행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심을 천명하였다. 총 14조.
  7. 권5 신주(神呪) 제6 : 신라 밀교계통 고승들의 기이한 행적을 통해 불교와 무속의 융합 및 호국 불교의 모습 소개. 총 3조.
  8. 권5 감통(感通) 제7 : 불심이 남달랐던 일반 신자와 승려들의 기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력을 천명하였다. 총 10조.
  9. 권5 피은(避隱) 제8 : 구도 과정에서 세상을 등지고 홀로 불법을 닦은 승려들의 행적. 총 10조.
  10. 권5 효선(孝善) 제9 : 세속적 윤리인 효와 불교적 윤리(윤회, 인과응보)의 결합을 통해 신라인의 효행 사례 기록. 총 5조.

간본

조선초 간행본(선초본[鮮初本])

국보 제306호

삼국유사 권3~5
대한민국국보
지정번호 국보 제306호
(2003년 2월 3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제작시기 조선
비고 권3~5 1책
삼국유사 권제3-5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호
(1965년 4월 1일 지정)
(2003년 2월 3일 해지)
소재지 경기도 의왕시
비고 국보 제306호로 승격

이 간본은 삼국유사 권3~5까지의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인데, 푸른 비단으로 개장(改裝)한 표지 위에 큰 글자로 “三國遺事”라는 제첨(題籤)을 하고, 작은 글자로 “乙亥 昔珠”라고 적혀 있다. 본문은 책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내용이 손상된 경우는 보사(補寫)되어 있는데 앞부분 6장이 결락된 3권은 50장, 4권은 31장, 끝의 4장이 결락된 5권은 26장으로 도합 107장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책의 광곽(匡郭)의 길이는 정덕본(正德本)에 비하여 대체로 평균 1㎝ 내외가 크고, 변란(邊欄)은 모두 쌍변이다. 반면에 정덕본은 쌍변과 단변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왕들의 어휘(御諱)에 대한 피휘대상자, 이를테면 “隆(太祖의 父)”을 “豊”으로 대자피휘한 것 과 “武(惠宗의 諱)”를 결획피휘한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의 대상자에 피휘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정덕본의 여러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년, 임신년) 경주에서 간행된 정덕본보다 앞선, 14 세기말(조선초)에 간행된 현존하는 삼국유사 중 가장 빠른 간본으로 조선초기 서지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誤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6]

보물 제419-2호

삼국유사 권2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2호
(2002년 10월 19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 60-17
성암고서박물관
비고 권2 1책

권 2 기이(紀異)만 있는 잔본(殘本) 1책으로, 본문 49장 가운데 17~20장의 4장은 영인하여 보완하였는데, 표지는 후대의 개장으로 卍字문양이며 장정은 5침의 홍사(紅絲)로 맨 선장본(線裝本)이다. 앞 표지 이면(裏面)중앙에 “黃馬仲陽月買得 泥山南氏家藏”이란 묵서가 있고, 그 옆에는“黃馬二陽月買得 開 日藏”이라는 부기(附記)가 있으며 뒤 표지 이면에는“니산장(泥山藏)”이란 묵서가 있어, 무오(戊午)년 2월에 남씨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보면 전체 49장 중 24장은 광곽(匡郭)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1㎝이상 길고, 변란(邊欄)은 정덕본이 쌍변(雙邊)과 단변(單邊)이 혼재되어 있는 데 반하여 모두 쌍변이다. 내용면에서는 고려왕(高麗王)들의 이름자를 피해 쓰는 피휘(避諱)가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 간행본임을 알 수 있으며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의 오류를 교정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가장 귀중한 사서 중의 하나로, 이 책은 현존하고 있는 삼국유사 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선초기 간본의 서지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도 양호하다.[7]

범어사본(보물 제419-3호)

삼국유사 권4~5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3호
(2002년 10월 19일 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소유자 범어사
비고 권4~5 1책
삼국유사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지정번호 유형문화재 제31호
(1999년 11월 19일 지정)
(2002년 10월 19일 해지)
비고 보물 제419-3호로 승격

이 책은 14세기말(조선초) 경주에서 간행된 것으로 삼국유사의 현존본 중 가장 빠른 간본인 동시에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초기본들의 훼손된 부분과 결락된 부분을 보완함은 물론 동시에 정덕본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삼국유사 권제4~5까지 2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4가 31장, 권5는 전체 30장에서 2장(제26-27) 이 결락된 28장의 도합 59장인데 첫장 상단의 묵서 기록으로 보아 광무11년(1907년) 오성월(吳腥月)이 입수하여 범어사에 기증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광곽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크고, 변란도 모두가 쌍변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가 보이고 특히, 고려왕들의 어휘(御諱)대부분에 피휘(避諱)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선초 판본 중 유일하게 권4의 이혜동진(二惠同塵)·자장정률(慈藏定律)·원효불기(元曉不 )·의상전교(義湘傳敎) 등의 편에 구결(口訣)로 현토(懸吐)가 되어 있으며, 권제5의 제27-30장 이 있는 것은 범어사본이 유일하다.[7]

정덕본(임신본)

이 간본은 조선 중종7년(1512년, 임신년) 경주에서 간행된 것이다.

규장각본(국보 제306-2호)

삼국유사
(三國遺事)
대한민국국보
지정번호 국보 제306-2호
(2003년 4월 14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림동 산56-1
서울대학교
비고 권1~5 2책
삼국유사<권1-5>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5호
(2002년 10월 19일 지정)
(2003년 4월 14일 해지)
비고 국보 제306-2호로 승격

이 책은 황의돈 교수의 소장이었으나 뒤에 통문관을 거쳐 서울대학교로 이관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왕력(王曆)과 권제일~권제오까지 5권을 2책으로 묶은 것으로, 왕력 15장, 권제일 37장, 권제이 49장, 권제삼 56장, 권제사 31장, 권제오 30장, 발문(跋文)1장 등 총219장이다. 형태적인 면으로 볼 때, 본문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표제(表題)에는 큰 글자로 “三國遺事”라 묵서되어 있으며, 표지는 개장한 것으로 격자문양(格子紋樣)의 한지에 주사(朱絲)를 이용한 오침철장(五針綴裝)이다. 跋文 1장을 제외한 전체 218장 중에서 匡郭의 길이가 鮮初本에 비하여 평균 1㎝ 내외 짧고, 邊欄은 鮮初本이 모두 雙邊인 데 반하여 이 책을 포함한 中宗壬申本은 雙邊과 單邊이 混在되어 있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정덕본 삼국유사로서는 낙장이 없는 유일한 책이다. 국내에 現存하는 다른 中宗壬申本을 대상으로 四周 匡郭과 文字의 마멸도를 비교한 결과 이 책은 匡郭과 文字의 缺落 또는 마멸된 부분이 가장 적고 인쇄도 선명하여 16세기 전기(前期)에 인출(印出)된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면에서는 中宗壬申本 간행시 鮮初本의 誤謬를 수정한 것 못지 않게 새로운 오류를 일으킨 것도 적지 않아 조선초기 刊本과 文字上 많은 차이를 보인다. [7] [8]

보물 제419-4호

삼국유사 권3~5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4호
(2002년 10월 19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
소유자 고려대학교
비고 권3~5 1책

이 책은 삼국유사의 권제3~권제5까지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3의 첫부분 10장, 권5의 18장 후면부터 31장(발문)까지 모두 23장이 결락되었다. 표지는 개장(改裝)한 것으로 홍사(紅絲)를 이용한 오침철장(五針綴裝)이며, 최남선의 소장이었다가 후에 고려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에 경주에서 간행한 책판(冊板) 에서 인출한 것인데 국내에 현존하는 정덕본 삼국 유사 가운데서 규장각본과 함께 비교적 초기에 인출한 선본(善本)에 속하며, 중종임신본의 서지적인 특징 및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정덕본 중에서는 유일하게 구결(口訣)로 현토(懸吐)되어 있어서 독해에 도움을 준다.[7]

삼국사기와의 비교

삼국사기》가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야사에 해당하는데, 이는 일연이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존중하면서 《삼국사기》에 채 실리지 못한 단군조선, 가야, 이서국 등의 기록과 수많은 불교 설화 및 향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우선 역사서술의 체재를 삼국사기와 달리하고 있다. 정사로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되어 있으나, 개인의 저술인 삼국유사는 내용별로 편목을 나누어 옛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기술된 옛 이야이기의 주제들은 체재상의 제약없이 저자에 의하여 자유로이 선택된 것들이다. 삼국유사의 편목 중에는 중국 고승전의 체제를 방불케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대로는 아니다. 가령 탑상조 같은 것은 그 예이다.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들의 해석을 가미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사로서의 기전체의 성질상 기존 사료의 재편성이 주된 작업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유로웠다. [9]논자에 따라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비교하기 적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같은 불교사서인 고승전과 비교해야 온당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는 상대, 중대, 하대의 3시기로 구분하며, 성골이 아닌 진골이 집권하기 시작한 태종무열왕부터를 중대로 삼았고 진골과 그 방계왕족간의 왕위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한 선덕왕 이후를 하대로 보았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의 3시기로 구분하며, 불교식 왕명과 중앙관제를 도입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한 법흥왕을 중고의 시작으로 삼고, 중국식 시호를 받기 시작한 태종무열왕 이후를 하고로 보았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삼국사기의 3시기 구분법을 중심으로 신라사를 연구하는데, 삼국유사의 상고와 중고가 삼국사기의 상대 안에 포함되므로 상고와 중고를 추가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조작설

古記云昔有 桓囯謂帝釋也 庻子桓雄...(《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

— 《삼국유사》(규장각본)〈권제1〉고조선 조(條)

《삼국유사》의 고조선 관련 기록에서 환인(桓因)이 원래 환국(桓國)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문정창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 하에서 《삼국유사》 정덕본을 영인하면서, 이마니시 류가 주동이 되어 한국의 역사를 날조하면서 ‘환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10] 책에는 붓으로 덧칠하여 원래의 글자를 바꾼 흔적이 있으며 1904년 일본 도쿄 제국대학에서 출간된 《삼국유사》에는 해당 구절이 “昔有桓國(석유환국)”으로 인쇄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같은 시대에 쓰여진 《제왕운기》에서도 ‘환국’이 아니라 ‘환인’ 또는 ‘상제환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평양 조(條)에서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도 ‘因’ 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덕본이 판각(1512년)되기 이전에 편찬된 《단종실록(노산군일기)》단종 즉위년(1452년) 6월 28일 기록에는 “《三國遺史》, 有曰 ‘《古記》云 “昔有桓因庶子桓雄...(《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고기》에서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덕본 이전의 《삼국유사》에도 환인(桓因)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쿄 제국대학본 《삼국유사》에도 “昔有桓國(석유환국)”에 이어 “謂帝釋也(위제석야)”라는 할주가 붙어 있어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석은 불교용어로 제석환인은 불교의 신인 인드라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환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다.[11]

최남선은 정덕본보다 고본(古本)인 “송석하본(宋錫夏本, 석남본)”을 비롯하여 “광문회본(光文會本),”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 등을 교감하여 정덕본의 “囯”자가 원래 “因”의 이체자(異體字)인 “口 + 土”(口자의 내부에 土 가 들어 있는 형태) 또는 “𡆮”으로 새겨야 하는 것을 실수하여 囯으로 잘못 새긴 오자(誤字)임을 고증하였다.[12] 최남선의 고증 이래 한국사학계에서는 환국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이 보기

각주

  1. 삼국유사 권3~5 국보 제306호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삼국유사,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9101&cid=40942&categoryId=33382]
  3. 구인환 (2002). 《삼국유사》. 신원문화사. 417쪽. 89-359-1060-0. 
  4. 구인환 (2002). 《삼국유사》. 신원문화사. 426쪽. 89-359-1060-0. 
  5. 정구복 (1999). 《한국중세사학사(Ⅰ)》. 집문당. 291쪽. 8930307485. 
  6. 문화재청고시 제2003-6호,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지정》, 문화재청장, 2003-02-03
  7. 문화재청고시 제2002-44호, 《국가지정문화재<보물>지정》, 문화재청장, 2002-10-19
  8. 문화재청고시 제2003-20호,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지정》, 문화재청장, 2003-04-14
  9. 이기백,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 진단학회, 《진단학보 36》, 1973.12, “三國遺事는 우선 歷史叙述의 體裁를 三國史記와 달리하고 있다. 正史로서 편찬된 三國史記는 紀傳體로 되어 있으나, 個人의 著述인 三國遺事는 內容別로 篇目을 나누어 故事를 記述하고 있다. 記述된 故事의 主題들은 體裁上의 制約 없이 著者에 의하여 자유로이 선택된 것들이다. 三國遺事의 篇目 중에는 中國高層傳의 體制를 방불케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대로는 아니다. 가령 塔像條 같은 것은 그 例이다. 三國史記도 일정한 目的 밑에 記事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編纂者들의 解釋을 加味하고 있기는 하지만 正史로서의 紀傳體의 성 질상 旣存史料의 再編成이 主된 作業이었 다. 이에 대 해서 三國遺事는 主題나 史料의 選定이 훨씬 自由로왔다.”
  10. 문정창, 《군국일본조선강점 삼륙년사》 중·하, 백문당, 1965년.
  11. 이가원・ 허경진 역 《삼국유사》(한길사, 2006) 64~65쪽
  12.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1938년 / 최남선, 《신정 삼국유사》, 1954년 / 중화민국교육부, 異體字字典, 2000년[1]

참고 자료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