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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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邕, 雍)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대종은 순창 옹씨(淳昌 邕氏) 또는 옥천 옹씨(玉川 邕氏)이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옹(邕)씨는 772명, 옹(雍)씨는 192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

  • 순창 옹씨(淳昌 邕氏) 또는 옥천 옹씨(玉川 邕氏)는 전라북도 순창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시대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옹희태(邕羲泰)이다. 중시조 옹몽진(邕夢辰)은 옹태운의 아들로 1553년(조선 명종 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음성현감을 역임하고 충청도사, 형조좌랑, 예조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이르러 집안을 다시 세우면서 옹몽진의 증조부인 옹은(邕誾)을 1세조로 하고 있다.[1] 본관은 옥천(沃川)이지만, 옥천은 순창의 옛 지명이기 때문에, 1930년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 본관을 기록할 때에 일족 중의 일부가 바뀐 지명인 순창으로 본관을 등록함으로써 순창 옹씨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본관은 동일한 본관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족보에서 역시 두 본관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기재하고 있다.
  • 거창 옹씨(居昌 邕氏) : 1930년에 실시된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 당시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신고함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 파평 옹씨(坡平 雍氏) :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로 경상남도 창원군 능남면 안민리에 8가구가 있었다. 옹(雍)씨는 원래 순창 옹(邕)씨인데 1908년 민적 기재시에 안민리에 살던 옹(邕)씨를 잘못 기재하여 옹(雍)씨가 되었다고 한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41가구, 135명으로 조사되었다.
  • 부령 옹씨(邕氏)도 전하고 있으나 그 시조는 알수없다.
  • 웅진 옹씨(甕津 雍氏)는 1985년도에는 총 69명으로 이루어진 15 가구가 살았으며, 2000년도에는 57가구, 192명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다.[2]

순창 옹씨

순창 옹씨 (淳昌 邕氏)
옥천 옹씨 (玉川 邕氏)
관향전라북도 순창군
시조옹희태 (邕羲泰)
중시조옹몽진 (邕夢辰)
집성촌전라북도 순창군
전라북도 정읍군 )
강원도 철원군
인구(2000년)772명
(순창 옹씨: 353명)
(옥천 옹씨: 407명)

순창 옹씨(淳昌 邕氏) 또는 옥천 옹씨(玉川 邕氏)는 전라북도 순창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옥천옹씨세보(玉川邕氏世譜)』에 따르면 옹씨는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성씨로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여러 대에 걸쳐 높은 관직과 훈작으로 영화를 누리던 명문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병부상서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를 비조로 한다. 옹경성(邕慶星), 옹의성(邕義星), 옹명정(邕命廷) 등 여러 상계 조상들이 조선의 개국 때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둔하거나 성을 감추고 있다가 초산(지금의 정읍)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옥천(전북 순창)의 향리로 강속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가승과 종적이 실전되었다고 한다.

중시조 옹몽진(邕夢辰)은 옹태운의 아들로 1553년(명종 8년) 친경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음성현감을 역임하고 충청도사, 형조좌랑, 예조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이르러 집안을 다시 세우면서 옹몽진의 증조부이신 옹은(邕誾)을 1세로 하고 있다.

옥천 옹씨 항렬표

  • 15세 규(奎)
  • 16세 종(鍾)
  • 17세 원(源)
  • 18세 상(相)
  • 19세 환(煥)
  • 20세 재(在)
  • 21세 현(鉉)
  • 22세 태(泰)
  • 23세 근(根)
  • 24세 병(炳)
  • 25세 균(均)

인물

고려시대

  • 옹경성(邕慶星) : 고려말의 인물로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국운이 날로 기울어짐을 개탄하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었다.
  • 옹의성(邕義星) : 고려말에 벼슬하여 도통(都統)·승선(承宣) 등을 역임하고 치안(治安)에 관한 15조를 지어 올렸다.
  • 옹명정(邕命廷) : 고려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 옹은(邕誾) : 순창 옹씨 1세조
  • 옹희태(邕羲泰) : 비조, 옹은의 아버지, 고려말 병부상서.

조선시대

중종

  • 옹은운(邕殷雲) : 옹몽진의 아버지, 중종13년(1518년) 순창군의 호장.
  • 옹은필(邕殷弼) : 자는 몽득(夢得). 순창 출신. 조선 중종 35년(1540년)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3등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부친은 계공랑(啓功郞: 종7품 동반(東班) 문관) 옹처겸(邕處謙)이다.[3]

명종

인조

  • 옹달행(邕達行•) : 무과(武科), 인조2년(1624년) 때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3등에 녹후되고, 병자호란때 세운 공으로 훈련원 판관에 제수되었으며 효행이 뛰어나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 옹경우(邕景祐) : 자는 영숙(永叔). 조선 인조 2년(1624년)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2등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부친은 옹달선(邕達善), 동생은 옹경지(邕景祉)이다.[4]
  • 옹경신(邕景信•): 자(字)는 이립(而立)으로,무과(武科), 인조2년(1624년) 때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훈록되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군공을 세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에 제수되었다. 만년에 효행(孝行)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첩을 받았다.

효종

  • 옹희익(邕熙益) : 자는 겸중(謙仲). 순창 출신. 조선 효종 2년(1651년) 신묘(辛卯)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부친은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옹경신(邕景信)이며, 동생은 옹희윤(邕熙允)이다.[5]
  • 옹기풍(邕基豊•) : 학문이 뛰어난 동몽교환에 증직되었다.
  • 옹륜학(邕侖鶴•) : 조선 때의 효자(孝子)로 초명(初名)은 륜기(崙奇), 자(字)는 명서(明瑞), 효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고종

  • 옹택규(邕宅奎) : (字)는 처안(處安), 호(號)는 우연(又蓮), 조선조(朝鮮朝)에 문장(文章)과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일찍이 감영(監營)의 희현당(希賢堂)에 가서 감사(監司) 이병문(李炳文)과 시(詩)를 차수(唱酬)하였는데, 감사(監司)가 "청연(靑蓮)이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으로 우연(又蓮)이라고 호(號)를 지어 주었다. 1885년(고종22) 부름을 받아 용양위 부사용(龍쵃衛副司勇)에 기용되고 이어 선략장군행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行龍衛副司果)에 승진되었다.
  • 옹봉규(邕奉奎) : 중추원의관
  • 옹승규(邕勝奎) : 관찰부 주사

일본강점기 시절

  • 옹태룡(邕太龍, 1892~1988 전북 순창) : 1909년 2월 12일 최산흥(崔山興) 의진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순창지역을 중심으로 맹활약 한 독립군 양윤숙 의진.)

현대(20세기,21세기)

  • 옹경일(邕敬壹, 1972년 ~, 미국 샌프라시스코) : 국립 무용가, 현 옹 댄스 컴페니(Ong Dance Company)의 사장, 2006년 04월 27일 제20회 이사도라 던컨 상을 수상했다.

출처

주석

  1. 옹몽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통계청 성씨분포 자료
  3. 『가정19년경자식2월23일생원진사방목(嘉靖十九年庚子式二月二十三日生員進士榜目)』
  4. 『천계4년갑자10월13일사마방목(天啓四年甲子十月十三日司馬榜目)』
  5. 『신묘별시문[무]과방목(辛卯別試文[武]科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8 (16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