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존 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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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John Venn 1834-1923)

잉글랜드의 훔버사이드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열아홉이 되던 해인 1853년 케임브리지의 카이우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칼리지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수학과 관련된 특별한 지식도 별로 없었다. 1857년 졸업과 동시에 특별 연구원이 됐다. 벤은 영국국교의 복음파라는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 2년 후인 1859년에는 사제로 임명받고 1년간 부목으로 있었다. 1862년에는 다시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돌아와 윤리학을 강의하게 된다.

이 시기에 벤은 논리학과 확률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의 전공은 확률과 논리학이었다. 벤은 불의 기호논리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책 [가능성의 논리]에서는 확률이론을 연구했다. 이 책은 매우 독창적이고 통계이론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유명한 벤다이어그램은 1880년 논문 [명제와 논리의 도식적-역학적 표현에 관하여]에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벤다이어그램은 집합 사이의 관계를 도식화하는 도구로서 개발된 것이다. 이 논문은 여러 철학잡지와 과학저널에 소개됐다. 형식논리에 있어 도형이나 도표를 사용한 역사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이런 다이어그램이 벤과 관련돼 있다고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벤 이전에도 다이어 그램을 사용한 흔적은 있지만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엮은 것은 벤의 몫이다. 1881년 그의 논리학 관련 첫책인 [기호논리학]이 출판되기도 했다. 기호논리학에는 그의 논리학에 관한 업적이 총망라돼 있다고 평해진다. 1889년에는 [경험논리의 원리]라는 책을 내기도 한다.

한편 1883년 벤은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이즈음 벤은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관심을 선회한다. 1870년 이미 교회를 떠났던 그의 관심이 역사로 바뀐 것이다. 벤은 자신의 칼리지 역사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후 그는 캠브리지대학의 역사설를 엮는 방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1922년 첫권을 출판한 것을 비롯해 세권을 완성했는데, 그의 작업은 뒤이어 계속돼 현재 여덟권의 케이브리지 사서가 편찬됐다. 역사학자들은 그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벤은 기계제작 등에도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는 등 다른 분야의 재주도 출중했다. 한 예로 크리켓볼을 굴리는 기계를 제작했는데 성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1909년 호주의 크리켓 경기팀이 케임브리지를 방문했을 때 벤의 기계가 네 번이나 최고수를 이겼다고 한다.

♣ 혹자는 벤을 수학적 업적이 전혀 없는데도 벤다이어그램이란 별 것 아닌 도안 하나로 유명해졌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벤다이어그램이 논리학에 남긴 족적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논리학과 수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학이 논리적 엄밀성과 객관성을 가진 학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상적인 수학을 그림으로 구체화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어쨌든 벤은 수학사에 이름을 확연히 남긴 것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