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제임스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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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밀(James Mill, 1773. 4. 6 - 1836. 6. 23)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활동한 영국의 계몽주의자, 공리주의 철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동인도회사의 간부로서, 존 스튜어트 밀의 부친이다.

스코틀랜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열성적인 어머니에 의해서 성을 스코틀랜드 식 표기인 Milne에서 잉글랜드 식 표기인 Mill로 바꾸고, 계몽주의적 교육을 받았다.

에든버러대학교에서 그리스어 학자가 된 뒤 1798년 장로교 전도사 자격을 얻었고 곧 교직으로 나아가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802년 런던으로 가 언론계에서 집필활동으로 주로 생업을 이었다.


그의 저술활동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었고 1808년 공리주의 철학자 창시자 제러미 벤담과 사귀었다.

1748년생인 벤담에 비해 25살 어린 밀은 사회적 명성으로나 업적 재산 등에서 비교할 수 없었으나 제자 보다는 친구처럼 교유할 수 있었고 벤담의 철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공리주의를 널리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밀에게 벤담은 전폭적인 경제적 사회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1806년생인 장남 존 스튜어트 밀 이하 6남매를 둔 가난한 저술가에게 큰 힘이 되었다.


밀은 언론에 많은 글을 쓰면서 벤담의 사상을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그의 곁에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였다.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했던 인물들을 가리켜 이른바 철학적 급진주의자(philosophical radicals)라고 하는데, 밀은 거기에 참여한 젊은이들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지도자로 활약했다.


사회적으로도 영국 사상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만, 그만의 특이한 업적으로는 장남 존 스튜어트 밀을 특유의 방법으로 영재교육 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장남의 교육만은 각별히 신경썼다. 벤담과 자신을 이어 공리주의를 널리 알리는 아들로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당시 유럽지성사에서 일찌기 없었던 조기 천재교육을 시킨 것이다.

결국 그의 노력은 결실을 보아 자신의 개인적 업적보다도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로써 오늘날 더 유명하게 되었고 그의 영재교육은 교육계에서도 중요한 참조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시키는 지나친 엄격주의 교육은 장남의 지성엔 놀라운 발전속도를 보였지만 감성적 사회적 능력에 한계를 드러내 존 스튜어트 밀은 21세무렵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맞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지적 사회적 활동은 장남의 학문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기교육 자체가 1:1 맞춤교육이었고 항상 아들은 아버지의 정신적 교육적 지도 하에 성장하였으며 철학, 심리학, 경제학 등 다방면의 영향을 받으며 나이 어린 천재 지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편찬할 때에 정치 법률 교육 방면에 참여했는데, 그 글들은 인기가 높아 별도 인쇄되면서 정치개혁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저서이자 출세작으로 『영국령 인도의 역사』가 있는데, 인도 땅에 발 한번 디뎌보지도 않고 힌두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어로 된 문헌만을 기초로 집필한 책이다. 그러면서도 예컨대 아라비아 숫자와 십진법이 고대 인도에서 발명되었다든지, 아리아바타(Aryabhata, 476-550)가 땅이 둥글고 주위에 별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등의 기록을 서양문명이 전파된 다음에 날조된 이야기로 일축했다. 이 때문에 서구중심주의에 입각한 제국주의 이론가의 전형적인 사례로 간주되며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지성은 영국의 인도 통치에도 많은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국의 인도지배를 비판하는 <영국령 인도사>를 썼음에도 출판 2년 후인 1819년 인도회사의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점차 승진하여 1830년 심사국장이 되었다.

힌두 전통을 억압하는 강압통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온건하면서도 합리적인 통치를 유도해낸 것이다.

인도와의 인연은 그로서 그치지 않고 아들 존 스튜어트 밀이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1858년까지 35년 동안 근무하면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을 선물했다.


그의 저서〈정치경제학 입문 Elements of Political Economy〉(1821)은 주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서에 근거해 공리주의 철학을 가미한 철학적 급진주의자의 견해를 요약해준다.

이 저서는 자본과 인구문제, 노동가치설, 토지과세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마르크스도 이 책의 노동가치설에 힘입은 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