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위구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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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태와 구태 문제[편집]

위구태는 2세기 사람인데 온조는 기원전 1세기 사람입니다. 아들이 아비보다 먼저 살았다는게 말이 되나요?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14.44.82.108(토론 | IP 정보)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예, 맞습니다. 기존의 위구태왕에 대한 문서 내용은 신빙성이 없고 여러 학설과 추측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습니다. 제가 기존의 위구태 혹은 위구태왕 문서를 전부 삭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문서를 작성하였습니다. 1차 자료로 한국의 삼국사기, 중국의 북사, 수사, 만주원류고 등의 사서를 참고하였고, 2차 자료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의 여러 논문들을 참고하였습니다. 현재 문서의 용량이 약 1만 바이트 정도 되는데, 이 문서 내용은 전적으로 제가 작성한 것이며, 그 책임도 저에게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좋은 기여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6월 25일 (월) 03:19 (KST)[답변]

위구태 문서를 정리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불필요한 인용과 무관한 내용, 유사역사학에 해당하는 내용은 삭제하였으며, 학계의 견해와 원사료를 중심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몇 가지 있어 아래에 정리합니다.

  • 위구태를 백제의 시조 구태와 직접적으로 관련지어 보는 견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견해는 유사역사학에 해당하며(하단에 기술), 그나마 관련성을 언급한 이홍직의 주장 역시 구태라는 명칭이 부여계 인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 위구태와 동일 인물 또는 관련된 인물이라는 견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인물은 명백하게 구분하여 서술해야 하며, 당연히 시조 구태설과의 통합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 위구태를 서부여라고 보는 견해는 오재성이라는 사람의 책에서 근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해당 저자는 저서나 관련 검색어 등으로 볼 때 완벽한 유사역사학자로 제대로 된 근거로 볼 가치가 없습니다. 소수설의 하나로 언급할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일단 부여 항목에서나 언급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지 위구태 항목에서 언급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일단 삭제하였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3일 (화) 13:27 (KST)[답변]

부여의 왕자 위구태와 부여의 왕 위구태왕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본다고 Xakyntos 님이 쓰셨는데요. 그게 현재 학계의 정설인가요, 아니면 일부 견해인가요? 시기적으로 보면, 위구태 왕자가 있던 시기와 위구태왕이 있던 시기가 거의 비슷하여, 젊을 때 왕자였다가 나이 들어서 왕이 된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입니다만, 두 인물을 서로 별개의 인물로 보고 편집을 한 듯 하여, 질문을 드립니다. 참고로 제가 본 서적에는 위구태 왕자와 위구태왕이 동일한 인물로 나옵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10월 23일 (화) 21:41 (KST)[답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중국정사조선전》에서는 두 사람을 별개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시 두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병도는 앞선 인물인 왕자 위구태가 원래는 그냥 구태고, 뒤에 위구태는 구태와 닮았다고 해서 위구태라 이름지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위"를 붙여서 닮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더하는 것은 고구려의 태조왕 궁과 산상왕 위궁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황적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증거도 있는데, 위구태는 120년대에 태자였는데, 167년에는 부태왕이 국왕으로 나옵니다. 위구태왕의 재위 연대는 적어도 180년대 이후죠. 60년 동안이나 태자로 있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울 뿐더러 그 중간에 다른 왕이 있는 이상,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아사달 님께서 참고하신 책의 견해는 어떻습니까?--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3일 (화) 22:23 (KST)[답변]
그럴 수도 있겠군요.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말도 근거가 있군요. 다만 고구려 태조대왕은 휘가 궁(宮)이고, 산상왕(--> 사실은 동천왕?)의 휘는 위궁(位宮)인데, '위'(位) 글자가 좀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구태(仇台)와 위구태(尉仇台)는 '위'(尉) 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병도의 학설에 따르면, 닮았다고 하여 '위'자를 붙였는데, 왜 '위'(位)와 '위'(尉)의 한자 표기가 서로 다른건가요? 음차 때문인가요? 이 점만 밝혀진다면, 이병도 학설이 타당하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 한자가 다른 것이 좀 꺼림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10월 23일 (화) 23:20 (KST)[답변]
그 부분은 음이 같으니 통한다고 이병도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병도의 언어 관련 추측은 무리한 점이 많아서 약간 거시기하긴 합니다. 근데 어차피 위자가 있던 없건 연대 자체가 안맞기 때문에 상관이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4일 (수) 00:03 (KST)[답변]
구태와 위구태에 관한 이병도의 추측은 좀 무리한 점이 많다는 견해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결국 '연대' 문제 하나만 남게 되는데, 이것도 그다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왕자 위구태는 서기 120년에 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하니 그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데, 부여의 왕 위구태는 활동 시기가 좀 애매합니다. 대략 180년경 이후라고 쓰셨는데, 그게 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위구태왕이 공손탁의 종녀와 결혼했다고 하니, 공손탁의 생몰 연대를 참조하면 되는데, 이게 좀 이상합니다. 현재 위키백과에서 해당 항목을 찾아보면, 공손탁은 서기 204년에 사망했다고 되어 있으나, 오히려 공손탁의 아버지인 공손연은 서기 238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의 활동 연대가 서로 뒤죽박죽입니다. 또한 부태왕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구태왕의 다음 왕이 간위거왕으로 되어 있고, 저도 그 기록에 따라서 위키백과를 편집하기는 했으나, 소수 의견인지 모르겠으나(?) 위구태왕의 다음 왕이 부태왕이라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구태 왕자, 위구태왕, 부태왕, 공손연, 공손탁의 주요 활동 연대에 대해서 하나의 확정된 단일한 학설이 있으면 좋겠는데, 좀 뒤죽박죽입니다. 그래서 연대 문제를 근거로 들어서 위구태 왕자와 위구태왕이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명확하지 않으며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잘못 알고 계십니다. 공손연은 공손탁의 아들이며 이 두사람의 관계나 활동 연대는 아주 명확해서 논란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마도 延하고 淵을 헷갈리셨나봅니다. 공손탁이 요동의 군벌이 된 것이 180년대 이후의 일로 직접 결혼까지 할 수 있는 왕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명백히 두 사람은 동일인물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편집했다시피, 왕자 위구태의 다음 왕이 부태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위구태가 2명이라면 첫번째 위구태의 다음이 부태왕이 되므로 역시 상관 없는 일입니다. 간위거는 두번째 위구태 다음의 왕입니다. --Xakyntos (토론) 2012년 10월 24일 (수) 16:59 (KST)[답변]
그렇군요. 延과 淵을 헷갈렸군요. 그렇다면 문제가 없겠습니다. 지금까지 논의를 종합해 보면, 부여의 위구태 왕자와 위구태 왕이 서로 다른 인물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도 Xakyntos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아사달(Asadal) (토론) 2012년 10월 25일 (목) 13:23 (KST)[답변]

외부 링크 수정됨 (2019년 8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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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9년 8월 4일 (일) 21:18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