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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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테러리스트라는 분류를 추가했습니다.[편집]

김구가 강량욱을 암살하려고 했을 때 죄없는 가족과 친구까지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기사 강량욱 암살 사건은 유엔에서 정한 테러리즘의 정의에 부합합니다. --평화소망 (토론) 2016년 1월 22일 (금) 16:31 (KST)

상식에 반하는 내용입니다 조선총독 죽일려고 했는데 그 가족이 죽으면 테러리스트인가요? 죄 없는 사람 죽일 의도를 가졌다면 테러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이 경우는Backtothe (토론)

집에 폭탄을 터트리면 가족이나 지인도 죽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지요.
해당 기사에서는 김구 관련 내용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근거를 제시해 주세요.-- Skky999 (토론기여) 2016년 5월 4일 (수) 10:54 (KST)
  • 의견

초창기에 이들은 김구-신익희로 이어지는 임정계의 지휘라인의 명령을 받아 행동했다. [1] 이들은 북조선에도 사람을 보내 대북타격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1]

1946년 전반 백의사를 비롯한 임정계 반탁운동원들은 북한지역에 침투하여 김일성, 김책, 최용건, 강량욱 등에 대한 암살, 테러를 시도하는 한편, 반탁운동을 선동하고 임정의 정권접수를 선포했다."[2]

이들은 북한에 청년을 파견하여 북한 요인 암살을 시도하였다. 1946년 3월 초 백의사는 결사대를 조직,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을 시도했다.[1] 2월 초 이성렬·백시영·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결사대'는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에서 정보수집 요령과 지하활동 방법에 대한 훈련을 받은 뒤 북한에 파견되었다.[1] 이들은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3·1절 기념행사에서 반탁운동을 벌임과 동시에 북한 정권 지도부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김일성은 재빨리 피하였고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던져 내어 실패하였다. 3월 1일 목적은 실패하고 미수로 끝났지만 백의사 결사대의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시도는 계속되었다.[1]

3월 3일에는 최용건(崔庸健)의 집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했고 3월 5일 최용건의 집을 재차 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3월 9일 김책(金策)의 집을 습격하였고 3월 11일에는 강량욱(康良煜)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아들·딸과 식모·경비보초 등을 암살하였다.[1]

백의사 결사대원 중 최기성과 김정의는 현장에서 조선 인민군에 체포되었고, 이희두는 인민군과의 총격전 중 사살되었으며, 이성렬만 살아서 월남하였다. 이들이 숨어있던 아지트에서는 임정포고문 제1·2호가 발견되었다. 김정의는 소련군에 끌려가 심문에서 임정 내무부의 정보국장 박문(朴文)이 증명서를 작성해 주었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고 언급하였다.[1] 또한 김정의는 김구는 이러한 계획을 승인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만나지 않아 자신의 북행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언급하였다.[1]

그 외에 임정 외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된 승차권이 발견되었다고도 한다.[3] 1946년 3월 군사시설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의사 대원들의 북한 습격은 북한 고위층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1] 이를 계기로 북한은 내부치안을 강력히 단속했고, 김구·이승만을 "팟쇼테로 강도단의 두목"이라며 맹렬히 비난하였다.[1]

  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76~80
  2.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2001년 7월 20일 발행) 268 페이지
  3.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사상사)

이 내용을 보면 김구가 계획을 승인했다고 합니다. --아름다움 (토론) 2016년 5월 4일 (수) 11:08 (KST)

김구가 38선 이북에 대한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여 대중 혹은 어떤 집단의 사람 혹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그들로 하려금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포기하게하려고 했다고는 보이는데 민간인을 상대로 한 것이라 테러리즘의 요건을 만족하는지 아니면 민간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부분은 토론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름다움 (토론) 2016년 5월 4일 (수) 11:11 (KST)

굳이 도입부에 부정적 서술 (정확히 말하자면 의혹) 을 강조할 필요가 있나요?[편집]

인물의 전체 인생을 간략히 요약하는 부분에 굳이 의혹 부분을 강조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그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인 이승만 문서도 도입부에는 전체적인 일생만 요약하고 있는데 말이죠.

계속 말도 없이 복구를 해대서 토론 올려봅니다. 의혹 서술은 문서 중간중간에도 있는데, 굳이 도입부에 그걸 강조해야만 할 필요가 있나요?

도입부에 서술하지 말자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자세한 정보는 본문에 싣고, 요약된 정보만 도입부에 서술하는 것이 맞습니다. --케골(토론) 2017년 4월 21일 (금) 19:48 (KST)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8월)[편집]

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김구에서 3개의 링크를 수정했습니다. 제 편집을 검토해 주세요. 질문이 있거나, 봇이 이 문서나 링크를 무시하기를 바라신다면 간단한 자주 묻는 질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세요. 다음 변경사항을 적용했습니다:

봇의 문제를 수정하는 것에 관해서는 자주 묻는 질문을 참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8년 8월 26일 (일) 12:04 (KST)

외부 링크 수정됨 (2018년 11월)[편집]

안녕하세요 편집자 여러분,

김구에서 9개의 링크를 수정했습니다. 제 편집을 검토해 주세요. 질문이 있거나, 봇이 이 문서나 링크를 무시하기를 바라신다면 간단한 자주 묻는 질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세요. 다음 변경사항을 적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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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InternetArchiveBot (버그를 제보하기) 2018년 11월 13일 (화) 10:52 (KST)

옥관빈 토론을 여기서 하세요[편집]

편집요약 보면 토론의 기본 운운한는 말까지 있는데 토론란이 아니니 당연히 토론의 기본이 안 되어있죠. 편집요약란은 토론하는 곳이 아니예요.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0월 24일 (토) 20:05 (KST)

1022,08:25‎판 서술이 이상합니다. 편집분쟁이 이상합니다. 분명 1021,18:20 판은 '본래 친일, 친일파 ≠ 현대한국어의 친일파 용례'라고 서술됐고 편집요약도 그 둘이 다른 의미라고 나와있는데, 이걸 왜 전혀 다른"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반민족행위) = 김다혜씨가 주장한 '친일'(일본과 친하다)"란 편집본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으로 곡해하신건가요? 편집요약이나 편집본이나 명확히 '본래 친일, 친일파 ≠ 현대한국어의 친일파 용례'라는 내용입니다. 전혀 다른 내용으로 왜곡해고 삭제하는 게 이상하군요. 그리고 1936년 조선총독부나 일제의 "친일"언급을 현대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친일"과 같이 용례라 분류한1022,08:25‎판이 독자연구입니다. 국어사전에 명확히 1번의 친일, 친일파와 '침략, 약탈 정책 지지 옹호 야합'한 2번의 친일, 친일파가 별도의 의미라고 분리하고 있습니다. 2018년 논문은 오히려 일치하고요. 국어사전에도 있는 용례구분은 부정하지 못하시고 일방적 해석을 가져오면 독자연구입니다. 그런데 1022,08:25‎판은 1021,18:20 판의 내용을 이상하게 왜곡했습니다.
분명 1021,18:20 판 '본래 친일, 친일파 ≠ 현대한국어의 친일파 용례'라고 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증거를 서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째서 전혀 다른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반민족행위) = 김다혜씨가 주장한 '친일'(일본과 친하다)"라는 내용이라고 왜곡하신거죠? 해석의 차이라 하기엔 실제 1021,18:20 판과 1022,08:25‎판이 곡해한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1022,08:25‎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과 임정이 사용한 "친일"이 해방후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친일"과 용례가 같다는 증거를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0월 24일 (토) 21:08 (KST)
임시정부 측은 옥관빈을 친일파로 보았고, 석현구를 일본측 밀정으로 보았다.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습니다.[1]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은

명사

  •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2]
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파"는
  •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3]
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래 친일, 친일파 ≠ 한국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친일, 친일파(2번 의미)는 차이가 있으며 전문가의 분석없이 비전문가의 가설은 위키백과에서 금지하고 있습니다.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입니다. [4] 해당 논문의 정의는 표준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용례이다.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0월 24일 (토) 21:08 (KST)
그리고 법률 외에 '증거불충분'이란 개념은 없어요.(출처 국어사전) 증거 역시 법률 외에선 '증명하는 근거'라는 의미로 '사실인정의 재료'는 법률용어입니다. 그에 비해 '무혐의'눈 법률 외 용어입니다.(출처국어사전) 법률외에선 '증거없는 무혐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증거불충분'이란 개념은 없어요. 결국 증거없는 무혐의 라는 게 다수설인데 법률 외에선 유죄,무죄 이분법이 없습니다. 그런 이분법은 형사소송법에만 존재합니다. '무혐의'는 '무죄'와 별개의 용어입니다.(출처국어사전) 무혐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무죄를 증명할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NO 친일파 '혐의'를 증명하는데 NO '친일파'를 증명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출처로 인용된 국어사전 보이시나요? 1021,18:20‎ 편집자는 국어사전을 몰랐지만 전 그걸 제시했죠. "기존 용어를 새롭게 정의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가정하여 부여"는 위키백과에서 금지입니다. 그런데 전 국어사전을 그대로 제시했으니 재정의가 아닙니다
그러니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입니다.[5]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입니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입니다.[6] 그에 비해 무혐의는 법률 외 용어이므로 해당 용어개념 사용은 오류가 아니다. [7]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는 무혐의'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부정하실거면 국어사전을 반박한 증거를 '인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주장이 아니고 '인용'을 하셔야합니다. 물론 위키백과:중립적 시각을 위반하면 안 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위키백과:중립적 시각을 위반하지 않는 자료입니다.
더 충격적인 게 있었군요. 원 사료엔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8]
이라고 나온 내용을 "임정 측은 옥관빈을 친일파, 변절자 또는 밀정으로 보았고"라고 왜곡하셨네요. "김구일파"가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이란 내용을 "임시정부"의 반응이라고 일반화하는 자료왜곡을 하신 건데 이걸 타인이 지워도 반복적으로 서술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대로 복사붙여넣기하여 올렸습니다. 하나도 고치지않고 복사붙여넣기 했습니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0월 24일 (토) 22:12 (KST)
서술분쟁 당사자가 토론에서 설명없이 '독자연구'라며 기습적으로 삭제시도를 했습니다. 독자연구라면 그 증거가 있어야합니다.
아래 내용이 독자연구란 증거가 무엇인가요?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8권 한인애국단 Ⅰ, 2008년 11월)[9]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10][11]
1933년 8월 9일 사건의 진상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韓人除奸團(한인제간단)'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옥관빈에게 6개조의 죄목이 있다면서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과 상해시민연합회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의 군사정치정참을 하였다'고 주장했다.[12][13][14]
피살 당시 옥관빈은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종종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였는데, 옥관빈은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언론은 옥관빈의 이러한 태도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을 사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15]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쓰지(中野勝次)는 이 사건을 "김구 일파의 애국단 대 이곳 한국독립당의 알력은 최근 마치 평안도파 대 황해도파의 대립과 같은 색채를 띠어 왔고 점점 더 격화하는 형세임은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음. 원래 이 항쟁의 연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독립당 측이 ‘이른바 애국단이라는 것은 우리 독립당의 일부분적 단체인 성질을 띠는 것으로, 애국단이라는 명의로써 헛되이 허장성세할 것이 아니라 一國一黨의 대세에 준거하여 독립당이 이를 지휘해야 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데 대하여 김구 일파의 애국단 일파에서는 ‘우리 애국단은 東京 및 신공원의 폭탄사건, 大連 사건 등 위대한 공적을 거두었는데 이 모두 우리의 자발적 행동이며 그 위대한 행동은 결코 멸시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범위의 확충과 아울러 바야흐로 혁명운동의 선봉임을 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라는 주장을 하는 데에 기인하고 있어서 도저히 당분간 원만한 결합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됨. 그간 독립당 측에서는 행정의 가장 중요한 구역인 上海 일대가 李春山의 체포 이래 유야무야 형세가 되어 시들하고 느른해져 부진한 경향이 있을 때 한편 애국단 방면에서 근래 부하에게 비밀리에 위촉하여 프랑스조계 일대에 불온 세력을 더하려는 기세가 있음. 安恭根, 安敬根의 이면적 활동에 대해 金東宇, 金玄九 등은 그 이면적 운동자로서 활약하는 듯하며, 독립당원으로서 몰래 애국단에 들어가 행동하려는 자가 있는 상황이라 하여 우려하고 있으며,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애국단 일파가 玉觀彬 외 車利錫, 金弘叙, 玉成彬, 李星鎔, 崔錫淳도 암살하려고 예정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자못 우려하여 지난달 15일의 독립당 區會에서도 대 애국단과의 알력 완화에 관해 결의한 사정이 있음. 그런데 최근 전기 차리석 등 피살 예정의 소문이 있는 5, 6명은 연명으로써 그 사실의 철저한 조사 및 이에 기인하는 독립당원 無辜怨殺 등 불상사의 미연 방지를 독립당 중앙(이사회)에 청원하겠다고 말함. 이 항쟁은 당분간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그 되어가는 형편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임"이라고 보고했다.[16]
김구는 안창호의 후견인 옥관빈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17]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18]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 피살 사건이 오면직엄순봉안공근, 안경근 등과 협력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경성지부법원 검사정에 보고하였으며 김구는 언급되어 있지않다.[19] 하지만 다른 일본 자료에선 김구가 언급되어 있다. [16][20]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결론은 증거없는 무혐의라 결론났다.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21]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2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23]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24]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25]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26]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27]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옥관빈이 친일밀정이라 주장한 이는 정화암으로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28] ("전거"는 증거가 아니다.[29])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30] 그 결과 옥관빈은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증거가 없는 무혐의라 결론이 나왔다.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 원인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31]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이다.[32]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이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이다.[33] 그에 비해 무혐의는 법률 외 용어이므로 해당 용어개념 사용은 오류가 아니다. [34]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는 무혐의'로 결론이 난 것이다.
소수파의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13] 2008년 이호룡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35]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36]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14]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37] 2019년 2월 12일 한국일보 보도에는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후략)"라고 기술되었다.[38]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해 옥관빈이 사살됐는데 김구 일파의 주장에 의하면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했다하며[11]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20]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친일"은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39]
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파"는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40]
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래 친일, 친일파 ≠ 한국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친일, 친일파(2번 의미)는 차이가 있으며 전문가의 분석없이 비전문가의 가설은 위키백과에서 금지하고 있다.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41] 해당 논문의 정의는 표준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용례이다.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42]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43]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에 독자연구인 부분이 어디인가요? 정확히 복사붙여넣기를 해서 설명을 요구합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1월 20일 (금) 13:26 (KST)

옥관빈 암살 부분에 대하여[편집]

@118.216.129.147:

Jhysoccer 편집본에 대한 토론[편집]

2020년 11월 24일 (화) 02:49‎ Jhysoccer가 등록한 '옥관빈 암살' 문단

김구1933년 8월 1일 발생한 옥관빈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36] 이 무렵 대표적인 친일파로 독립운동자들의 지탄을 받고 있던 인물은 옥관빈이었다.[37][44][45] 그는 일찍이 국내에서 김구와 함께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었고, 3·1 운동 뒤에는 상해로 건너와서 안창호의 측근으로서 임시정부활동에도 참여했다가, 임시정부활동이 쇠퇴해지자 임시정부를 떠나서 '慈藥敞(자약창)'이라는 제약회사와 '三德洋行(삼덕양행)' 등을 운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아 상해의 유명인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돈으로 신문사를 포섭하고, 상해정부의 고급관리는 물론 경제계와 종교단체와도 교분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호화주택을 가지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위세를 부렸다. 그는 독립운동기관에는 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일본군대를 위하여 2만 원 상당의 재목을 제공하고 일본관헌에게 혁명운동에 관한 정보를 밀고하는 등 밀정행위를 하고 있었다.[37][46][47]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떠나고 없는 상하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이었다. 이 단체는 만주사변 이후에 상해로 집결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정화암, 유자명, 李康勳(이강훈), 백정기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31년 9월경에 조직한 것이었다.[37]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과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연대하여 1931년 11월 중순에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일본의 주요기관 파괴, 요인 암살, 친일분자 숙청, 배일선전 등을 실행할 연맹의 행동대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37] 김구는 중국인들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자금은 확보했으나 일을 수행할 마땅한 인물이 없었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사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그리하여 김구의 자금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인력이 합작하여 옥관빈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이 일은 김구·안공근·정화암 세 사람만 알고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37]

김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정화암은 자전거 몇 대를 구입하여 옥관빈의 신원추적에 착수했다. 두 달 동안 추적한 끝에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옥관빈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공무국 경찰로 근무하는 그의 종형 옥성빈(玉成彬)의 집 뒤쪽 정자칸 방에 사는 흥사단 단원 이아무개의 부인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 집에 드나들었다. 이아무개는 漢口에서 소규모의 세발자전거 공장을 차리고 있어서 집을 비우고 있었다.[37] 옥관빈 암살은 김구의 심복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있는 오면직(吳冕稙)과 엄형순이 맡았다. 1933년 8월 1일 저녁 9시 무렵 옥관빈옥성빈의 집에서 나올 때에 기다리고 있던 엄형순이 자동차로 접근하여 권총 세 발을 쏘았고, 옥관빈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37][36]

옥관빈의 피살은 한인동포사회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옥관빈을 암살한 뒤에 김구 쪽에서는 1933년 8월 8일에 한인제간단(韓人除奸團) 이름으로 '역적 옥관빈의 죄상을 선포함'이라는 斬奸狀(참간장)을 작성하여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인신문과 중국신문에 배포했다.[37][48] 옥관빈이 암살되자 옥성빈은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 역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있던 친일파였다. 옥성빈도 넉 달 뒤인 1933년 12월 18일 오후 6시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해산(金海山)의 집 입구 길가에서 암살되었다.[37]

1933년 9월 1일 《삼천리》 제5권 제9호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상해 옥관빈 씨가 피살 당하였다. 그는 안창호의 부하로 있어 일도 많이 하다가, 정계에서 발을 끊고 실업에 종사하여 벌써 10년,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을 경영하여 100여 만 원의 거부를 이루었다. 각금 운동자금을 달라고 가면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버는 목적이 있다' 하고 모두 거절하여 왔으며 이것이 원한에 의한 피살(含怨被殺)의 주원인이라 한다."[49]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은 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50]

이 판에 대하여 2020년 11월 24일 04:38부터 편집요약으로 118.216.129.147님이 하신 비판([1])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굵은 글씨)

신뢰받는 출처인 150여 명의 친일인명사전을 이유없이 삭제하셨네요. 중국에서 한간이 아닌 애국자 취급받는 것도 삭제하셨네요. 무혐의와 증거의 비법률적 의미도 국어사전에 서술했는데 삭제하셨네요. -----> 친일인명사전에 '옥관빈은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단정적인 표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깔끔하게 그 부분을 복사-붙여넣기 해오셔서 논란을 종식시켜 주십시오. 그러지 않고 지금처럼 친일인명사전에 '옥관빈은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내용이 출판되지 않았는데도 그 내용이 출판된 것처럼 주장하시거나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독자연구입니다. 또한 교차검증 해보면 옥관빈을 친일파라 언급하는 신뢰할 수 있는 출처들이 많습니다. 그 중 일부는 님도 직접 인용하셨고요.
서술분쟁자는 "왜곡과 사론없이 온전히 인용된 내용들을 독자연구로 폄훼하는 소위 문서훼손 행위"라 요약하였는데 정작 복사붙여넣기된 내용을 이유없이 삭제하고 개인의 해석으로 대체하셨습니다. 복사붙여넣기만큼 "왜곡과 사론 없이 온전히 인용된 내용들"은 불가능합니다. 복사붙여넣기 않은 내용은 무슨 수를 써도 복사붙여넣기에 비하면 사론입니다. 편집요약을 지켜주십시오. ----> 복사-붙여넣기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개인 의견과 독자연구를 기입하셨고 결과적으로 인용문을 이용해 새로운 결과를 도출한 독자연구를 하셨기 때문에 과감하게 편집한 것입니다. 밑에 님 저술에 대한 토론 문단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한홍구 논문엔 밀정이라 살해했다는 내용 없습니다. 이점이 분명 복사붙여넣기로 서술됐습니다. 서술분쟁 당사자는 분명 "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았음", "인용해서(...)나열했을 뿐 여기에 사사로운 결론을 더하지 않았음."이라 주장했으면서 복사붙여넣기를 삭제하고 개인의 해석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복사붙여넣기보다 사론이 없는 서술은 불가능합니다. 복사붙여넣기 삭제하고 없는 내용 인용하는 게 독자연구입니다. ----> (한홍구 (2010년 08월 00일). 《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판. 일조각. 209쪽)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한홍구 논문엔 밀정이라 살해했다는 내용 없습니다'는 님의 개인적인 주장이자 독자연구이며, 독자연구는 인용될 수 없습니다. // 그리고 (서술분쟁 당사자는 분명 "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았음", "인용해서(...)나열했을 뿐 여기에 사사로운 결론을 더하지 않았음."이라 주장했으면서 복사붙여넣기를 삭제하고 개인의 해석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분쟁이 되고 있는 두 판 중 제가 기여한 판에 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았고, 인용해서 나열했을 뿐 사사로운 결론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랬다면 그 증거부터 제시 바랍니다. // 그리고 님 주장을 대충 정리해보면 '친일의 뜻과 밀정의 뜻과 친일파의 뜻 등은 모두 다르다. 한홍구는 옥관빈이 친일이라 했지, 밀정이라 하지 않았으니까 옥관빈은 밀정이 아니다'인데 이는 새로운 결론을 도출한 독자연구입니다. 독자연구는 복사-붙여넣기든 뭐든 애초에 인용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님 저술이 전반적으로 독자연구가 많고 본 김구 문서에 맞지 않는 옥관빈 순수 개인에 대한 인용문이나 친일파 용어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 내용들을 과감하게 편집한 거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 그리고 제가 어느 부분에서 개인의 해석으로 대체하였다는 건지 제시 바랍니다.
손세일의 주장을 '유혐의'의 증거로 간접인용했는데 손세일은 언론인입니다. 위키백과 중립적 시각 '비중의 적절성'항목에 의하면 150여명의 학자들의 합의를 우선해야하는데 관련 합의를 전부 삭제하고 학자가 아닌 언론인의 주장만을 증거로 서술했습니다. 참고로 '무혐의'와 '증거'의 비법률적 의미는 이미 문서에 서술됐으면 '무혐의'를 증명하는데 '무죄'를 증명할 필요가 없음은 이미 국어사전 복사붙여넣기로 인용됐습니다. 150여명의 합의를 제치고 손세일의 주장을을 유일한 증거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 월간조선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입니다. 그래도 의심되면 손세일에 반박하는 자료를 인용해 교차검증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리고 150여 명의 학자들이 '옥관빈은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등의 단정적인 문장을 출판하였나요? 그렇다면 깔끔하게 그 부분을 복사-붙여넣기 해오시면 됩니다. 150명이 'A는 B가 아니다'라는 내용을 출판하지도 않았는데도 '150명은 A는 B가 아니라고 했다'고 해석하시거나 주장하시는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 그리고 허위주장을 하셨습니다. 제 최신 기여판 어디에도 '유혐의'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학자가 아닌 손세일의 주장을 출처로 옥성빈 친일파란 서술이 의심되서 조사해봤는데 옥성빈도 무혐의로 예비에서 제외된 인물이었습니다. 손세일의 주장을 '유혐의'의 증거로 간접인용했는데 손세일은 언론인입니다. 위키백과 중립적 시각 '비중의 적절성'항목에 의하면 150여명의 학자들의 합의를 우선해야하는데 관련 합의를 전부 삭제하고 학자가 아닌 언론인의 주장만을 증거로 서술했습니다. 참고로 '무혐의'와 '증거'의 비법률적 의미는 이미 문서에 서술됐으면 '무혐의'를 증명하는데 '무죄'를 증명할 필요가 없음은 이미 국어사전 복사붙여넣기로 인용됐습니다. 150여명의 합의를 제치고 손세일의 주장을을 유일한 증거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150여명의 합의인 '무혐의'를 우선해야합니다. 무혐의 증명에 무죄를 증명해야할 이유 없고 위키백과:중립적 시각에 의해서 소수나 비역사학자의 주장을 우선하거나 유일한 사실로 인용할 수 없습니다. ----> 150여 명이 합의를 했다는 내용의 출판된 문장을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지 못하면 150여 명이 합의를 했다고 해석하신 거고 명백한 독자연구입니다. 그리고 무혐의를 우선해야 된다고 주장하시는 게 아니라, '무혐의가 다수설이다'라고 기술한 신뢰할 수 있는 출판물을 복사-붙여넣기 해오시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Argument from ignorance[편집]

"친일인명사전에 '옥관빈은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단정적인 표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깔끔하게 그 부분을 복사-붙여넣기 해오셔서 논란을 종식시켜 주십시오. 그러지 않고 지금처럼 친일인명사전에 '옥관빈은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내용이 출판되지 않았는데도 그 내용이 출판된 것처럼 주장하시거나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독자연구입니다."
라는 오류를 주장하셨는데 이건 오류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Argument_from_ignorance
'존재의 증거거 없으므로 존재가 있다, 없다'는 논리적 오류입니다.
그래서 '존재가 있다, 없다'가 아니라 '증거없음'이라 서술했죠.
존재의 증거가 없음으로 존재가 있다나 없다는 주장은 Argument from ignorance 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반박한 주장 어디에도 '친일파 아니다'란 주장은 없습니다. 없습니다. 다른 유저에도 없단걸 있다고 우기는데 친일파 아니다는 서술 없습니다. "증거가 없다"고 서술했습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10:30 (KST)


말씀 잘하셨습니다. '증거 없음'을 기반으로 한 주장은 Argument from ignorance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불분명한 내용을 위키백과에 다루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위키백과는 개인논문이 아닌 백과사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님의 저술 중 '증거가 없다고 결론이 났다'와 비슷하게 언급한 문단들은 싹 다 모아서 한 두 줄 정도로만 요약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의심받고 있거나 의심받을 만한 문서 내용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출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출처가 발견되지 않아서, 글쓴이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독자 연구”로 간주합니다. 당신이 쓴 글이 독자 연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과 같은 주장 또는 논거를 제시하는 공개 발표된 믿을 수 있는 출처를 밝히는 것뿐입니다(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

그리고 당신이 반박한 주장 어디에도 '친일파 아니다'란 주장은 없습니다. 없습니다. 다른 유저에도 없단걸 있다고 우기는데 친일파 아니다는 서술 없습니다. "증거가 없다"고 서술했습니다. ----> 이건 무슨 소리를 하신 건지 못 알아 듣겠습니다.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0:46 (KST)

"118.216.129.147님은 독자연구를 반복하고 계시며, 지속적인 위키백과:문서 훼손은 위키백과:차단 정책에 저촉됩니다."라고 하셨는데 정작 당신은 관리자에게 신고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셨습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32 (KST)

서술된 적 없는 '친일파 아니다'란 허위 서술 조작을 그만하세요.[편집]

"그리고 150여 명의 학자들이 '옥관빈은 친일파가 아니다'라는 등의 단정적인 문장을 출판하였나요? 그렇다면 깔끔하게 그 부분을 복사-붙여넣기 해오시면 됩니다. 150명이 'A는 B가 아니다'라는 내용을 출판하지도 않았는데도 '150명은 A는 B가 아니라고 했다'고 해석하시거나 주장하시는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150명이 'A는 B가 아니다'라는 내용을 출판하지도 않았는데도 '150명은 A는 B가 아니라고 했다'고 해석하시거나 주장하시는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그리고 님 주장을 대충 정리해보면 '친일의 뜻과 밀정의 뜻과 친일파의 뜻 등은 모두 다르다. 한홍구는 옥관빈이 친일이라 했지, 밀정이라 하지 않았으니까 옥관빈은 밀정이 아니다'인데
상대가 그런 주장을 했다고 서술을 반복하고 계십니다만 실제 편집본엔 '아니다'란 서술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도 하지 않는 '아니다'그만 왜곡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도 "무죄"라고 하지도 않은 발언 계속 했다고 조작하시는데 저한텐 "아니다"는 발언을 했다고 조작하시네요. 그런 발언 없습니다.
과거분쟁자가 저나 분명 "친일파가 아니다"가 아니라 "증거가 없다"고 서술했습니다. 실제 친일인명사전에도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라며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으면 등재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https://www.minjok.or.kr/archives/63785.)
'친일파가 아니다'란 서술이 있으면 그런 서술, 발언 했다는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복사붙여넣기해서 가져오십시오.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 복사붙여넣기를 해서 가져오십시오. 당신 계속 상대방이 '친일파가 아니다'고 했다고 조작하셨는데 '친일파가 아니다'가 아니라 친일파 증거가 없다고 서술했습니다. 타인이 작성한 적 없는 발언 조작 그만하세요. 편집본 어디에도 '친일파가 아니다'란 서술 없습니다. 계속 상대가 쓰지 않은 발언 조작 반복하고 계십니다만 어디에도 그런 발언 없습니다. 그런 발언이 있으면 존재한다는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4일 (금) 08:37 (KST)
증거가 없으니 '친일파다' '친일파 아니다'는 Argument from ignorance라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51]
그런데 실제 서술에는 '친일파 아니다'가 아니라 '증거없다'고 서술됐습니다. '증거없다'는 판단이 대다수란 증거가 친일인명사전입니다. 친일인명사전 제외자는 결정적 증거가 없어서 제외된 게 아니라 "객관 증거"와 기준에 부합성이 없어서 등재되지 못하는 것 입니다.(https://www.minjok.or.kr/archives/63785.) 증거가 없으니 친일파다아니다는 오류고 분명 편집본에 '증거가 없다'고 서술됐습니다. '증거가 없다'를 반박할 증거를 가져오십시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4일 (금) 09:02 (KST)


제가 뭔 허위 서술 조작을 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저는 깔끔하게 복사-붙여넣기 해오면 된다고 말했을 뿐인데 갑자기 역으로 저한테 반박할 증거를 가져오라니 무슨 소리십니까? 그리고 장황하게 글 쓰셨지만 결국 '옥관빈은 친일파가 아니다'와 비슷한 문장을 복사-붙여넣기 해올 수가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의심받고 있거나 의심받을 만한 문서 내용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출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출처가 발견되지 않아서, 글쓴이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독자 연구”로 간주합니다. 118.216.129.147님은 독자연구를 반복하고 계시며, 지속적인 위키백과:문서 훼손위키백과:차단 정책에 저촉됩니다.

의심받고 있거나 의심받을 만한 문서 내용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출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출처가 발견되지 않아서, 글쓴이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독자 연구”로 간주합니다. 당신이 쓴 글이 독자 연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과 같은 주장 또는 논거를 제시하는 공개 발표된 믿을 수 있는 출처를 밝히는 것뿐입니다. —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0:30 (KST)

"118.216.129.147님은 독자연구를 반복하고 계시며, 지속적인 위키백과:문서 훼손은 위키백과:차단 정책에 저촉됩니다."라고 하셨는데 정작 당신은 관리자에게 신고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셨습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32 (KST)

20201210: Jhysoccer에 해당 논리이론에 대한 증거 제시 요구합니다[편집]

토론란에서, IP사용자께서는 토론 상대방이 지적하지도 않은 부분에 대해 장황한 답변을 하여, 쉽게 말해 동문서답과 궤변을 하여 자신의 독자연구(예1> A이고 B니까 C이다 문장에서 A, B는 인용했지만 C는 출처없는 본인의 독자결론, 예2> A출처에 'B는 C이다'라고 출판되지 않았으므로 'B는 C가 아니다'라고 출판된 것과 같다는 독자적인 해석 및 주장, 예3> A출처에 'B단어의 뜻은 C이다'라고 나왔으므로 'D출처에 나온 B단어의 뜻도 C이다'라는 독자적인 해석)를 정당화하고 계십니다. 본 문서는 이와 같은 독자 연구 및 문서 훼손으로 인해 개인논문화가 되고 있으며, 이에 2020년 12월 2일 (수) 22:32 판으로 되돌리고 문서 보호 요청을 하였음
라고 편집요약란에서 주장하셨으면서 토론란에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상대가
1.논리를 주장했다는 증거 요구하며
2.그 논리가 잘못됐다는 신뢰성 있는 출처를 요구합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0일 (목) 09:05 (KST)

저는 Argument from ignorance의 출처를 제시했습니다. 영어 위키피디아에는 명백히 Duco A. Schreuder (3 December 2014). Vision and Visual Perception. Archway Publishing. p. 103. ISBN 978-1-4808-1294-9., "Argumentum ad Ignorantiam". Philosophy 103: Introduction to Logic. Lander University. 2004.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0 April 2009. Retrieved 29 April 2009., Fallacies : classical and contemporary readings. Hansen, Hans V., Pinto, Robert C. University Park,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5. ISBN 978-0271014166. OCLC 30624864., Locke, John (1690). "Book IV, Chapter XVII: Of Reason".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Retrieved 12 March 2015., Landers, Richard N. (2018). A Step-By-Step Introduction to Statistics for Business. SAGE Publications. p. 43. ISBN 978-1-5264-1752-7., "Don't Toss the Floss!". Retrieved 24 December 2018., Sambunjak, D.; Nickerson, J. W.; Poklepovic, T.; Johnson, T. M.; Imai, P.; Tugwell, P.; Worthington, H. V. (2011). "Flossing for the management of periodontal diseases and dental caries in adults". The Cochrane Database of Systematic Reviews (12): CD008829. doi:10.1002/14651858.CD008829.pub2. PMID 22161438. S2CID 205196903., "Argument from Ignorance". www.logicallyfallacious.com. Retrieved 23 November 2016., Sagan, Carl. "Chapter 12: The Fine Art of Baloney Detection". The Demon-Haunted World. 등 출처자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Jhysoccer는 논리에 대한 출처가 없습니다. Jhysoccer가 주장하는 논리의 증거를 요구합니다.
전 Argument from ignorance가 신뢰성 있는 출처에 나오는 오류인 점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Jhysoccer는 지속적으로 특정 논리를 주장하면서 논리에 대한 출처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에서 "개념"에 대한 독자연구도 금지이므로 "개념"에 대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0일 (목) 09:05 (KST)


"문서 편집자는 종종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실수를 합니다.

만약 A와 B가 공개 발표된 믿을 수 있는 출처의 자료라면, 이 둘을 조합하여 새로운 결론 C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만드는 한 예이며, 이는 독자 연구가 될 것입니다. “A이고 B이니까 C”라는 주장을 쓰려면, 먼저 해당 내용이 믿을 수 있는 출처를 통해 공개 발표되어야 합니다. 즉, 어떠한 해석도 먼저 믿을 수 있는 출처를 통해 공개 발표되어야만 위키백과에 실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좀 더 복잡한 조합의 예입니다. 첫 번째 문단은 허용됩니다.

김철수는 홍길동이 다른 저자의 책에서 참고 문헌을 그대로 복사해, 표절을 했다고 주장했다. 홍길동은 새로운 출처를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의 책을 이용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다음 문단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약 홍길동이 원전 출처를 참고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하버드 대학교의 "출처를 적는 법" 안내서에서 추천한 것처럼, 실제로 참고한 참고 문헌만 적도록 한 관례와는 어긋난다. 하버드 대학교의 안내서는 이 규칙을 어기는 것을 "표절"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았다. 대신에 원전의 정보, 발상, 단어, 문장 구조 등을 인용 없이 사용하는 것을 표절이라고 정의했다.

두 번째 글상자는 김철수가 원문에서 사용한 표절의 정의가 아닌, 작성자가 하버드 대학교 안내서에서 표절의 정의를 가져와서 사용한 것으로, 독자적 조합에 해당합니다. 두 번째 글상자와 같이 쓰고 싶으면, 홍길동과 김철수가 모두 하버드 대학교 안내서의 표절 정의를 인용해서 의견을 밝혔다는 것을 확인해줄 출처를 제시해야 합니다."

—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0:18 (KST)

토론 거부하며 시도한 문서보호 시도 거부됐으니 "개념"에 대한 증거를 요구합니다.[편집]

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D%82%A4%EB%B0%B1%EA%B3%BC:%EB%AC%B8%EC%84%9C_%EA%B4%80%EB%A6%AC_%EC%9A%94%EC%B2%AD#%EA%B9%80%EA%B5%AC,_%EC%98%A5%EA%B4%80%EB%B9%88_%EB%AC%B8%EC%84%9C_%EB%B3%B4%ED%98%B8_%EC%9A%94%EC%B2%AD

거부됐으니 반박할 "개념"에 대한 증거 제시를 요구합니다.
독자 연구(獨自硏究, Original research)는 위키백과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공개 발표되지 않은 사실, 주장, 개념, 진술 또는 이론을 의미합니다.
위키백과에서 개념에 대한 독자연구를 금지합니다.
1. 상대가 특정 논리를 주장하였다는 주장을 신뢰성 있는 논리자료를 증거로 제시할 것
2. 해당 논리(상대가 실제로 행했다는 증거를 선제시)가 오류라는 논리자료를 증거로 제시할 것
3. "친일" 개념에 대해 국어학계인 표준국어대사전과 역사학계인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을 삭제할 다수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것
4. 명백히 '친일파란 객관적 증거없음',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란 서술을 하였으며 '친일파가 아니다'는 서술이 전혀 없음에도 어째서 '친일파란 객관적 증거없음',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란 서술이 '친일파가 아니다'는 서술로 결론이 나는지 그에 대한 (독자연구가 아니라 인용이란 전제하에서) 증명하는 "개념"에 자료를 제시할 것. ('친일파가 아니다'는 증거를 제시 못 해서 친일파로 서술하는 시도가 오류라는 건 이미 제가 반박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저는 Argument from ignorance의 출처를 제시했습니다. 영어 위키피디아에는 명백히 Duco A. Schreuder (3 December 2014). Vision and Visual Perception. Archway Publishing. p. 103. ISBN 978-1-4808-1294-9., "Argumentum ad Ignorantiam". Philosophy 103: Introduction to Logic. Lander University. 2004.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0 April 2009. Retrieved 29 April 2009., Fallacies : classical and contemporary readings. Hansen, Hans V., Pinto, Robert C. University Park,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5. ISBN 978-0271014166. OCLC 30624864., Locke, John (1690). "Book IV, Chapter XVII: Of Reason".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Retrieved 12 March 2015., Landers, Richard N. (2018). A Step-By-Step Introduction to Statistics for Business. SAGE Publications. p. 43. ISBN 978-1-5264-1752-7., "Don't Toss the Floss!". Retrieved 24 December 2018., Sambunjak, D.; Nickerson, J. W.; Poklepovic, T.; Johnson, T. M.; Imai, P.; Tugwell, P.; Worthington, H. V. (2011). "Flossing for the management of periodontal diseases and dental caries in adults". The Cochrane Database of Systematic Reviews (12): CD008829. doi:10.1002/14651858.CD008829.pub2. PMID 22161438. S2CID 205196903., "Argument from Ignorance". www.logicallyfallacious.com. Retrieved 23 November 2016., Sagan, Carl. "Chapter 12: The Fine Art of Baloney Detection". The Demon-Haunted World. 등 출처자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옥관빈이 친일파가 아니다'는 서술을 한 것이 아니므로 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개념"에 대해 독자연구가 아닌 증거를 요구합니다. 주장하시는 "개념"이 독자연구가 아니라는 증거를 요구합니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0일 (목) 09:35 (KST)


저는 님이 가져온 개념이 독자연구라고 지적한 게 아니라, 그 개념을 인용해 독자적인 해석과 주장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명백한 독자연구입니다(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0:21 (KST)

독자연구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학계내 평가, 국어사전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친일의미가 이유없이 삭제되고 있습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33 (KST)

118.216.129.147 편집본에 대한 토론[편집]

2020년 11월 20일 (금) 13:51‎ 판 118.216.129.147가 등록한 옥관빈 사건 관련 문단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8권 한인애국단 Ⅰ, 2008년 11월)[52]

----> 적절한 인용임에 동의합니다.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53][11] ----> 적절한 인용임에 동의합니다.
1933년 8월 9일 사건의 진상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韓人除奸團(한인제간단)'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옥관빈에게 6개조의 죄목이 있다면서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과 상해시민연합회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의 군사정치정참을 하였다'고 주장했다.[54][13][14] ----> 적절한 인용임에 동의합니다.
피살 당시 옥관빈은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종종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였는데, 옥관빈은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언론은 옥관빈의 이러한 태도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을 사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55] ----> 적절한 인용임에 동의합니다.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쓰지(中野勝次)는 이 사건을 "김구 일파의 애국단 대 이곳 한국독립당의 알력은 최근 마치 평안도파 대 황해도파의 대립과 같은 색채를 띠어 왔고 점점 더 격화하는 형세임은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음. 원래 이 항쟁의 연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독립당 측이 ‘이른바 애국단이라는 것은 우리 독립당의 일부분적 단체인 성질을 띠는 것으로, 애국단이라는 명의로써 헛되이 허장성세할 것이 아니라 一國一黨의 대세에 준거하여 독립당이 이를 지휘해야 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데 대하여 김구 일파의 애국단 일파에서는 ‘우리 애국단은 東京 및 신공원의 폭탄사건, 大連 사건 등 위대한 공적을 거두었는데 이 모두 우리의 자발적 행동이며 그 위대한 행동은 결코 멸시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범위의 확충과 아울러 바야흐로 혁명운동의 선봉임을 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라는 주장을 하는 데에 기인하고 있어서 도저히 당분간 원만한 결합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됨. 그간 독립당 측에서는 행정의 가장 중요한 구역인 上海 일대가 李春山의 체포 이래 유야무야 형세가 되어 시들하고 느른해져 부진한 경향이 있을 때 한편 애국단 방면에서 근래 부하에게 비밀리에 위촉하여 프랑스조계 일대에 불온 세력을 더하려는 기세가 있음. 安恭根, 安敬根의 이면적 활동에 대해 金東宇, 金玄九 등은 그 이면적 운동자로서 활약하는 듯하며, 독립당원으로서 몰래 애국단에 들어가 행동하려는 자가 있는 상황이라 하여 우려하고 있으며,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애국단 일파가 玉觀彬 외 車利錫, 金弘叙, 玉成彬, 李星鎔, 崔錫淳도 암살하려고 예정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자못 우려하여 지난달 15일의 독립당 區會에서도 대 애국단과의 알력 완화에 관해 결의한 사정이 있음. 그런데 최근 전기 차리석 등 피살 예정의 소문이 있는 5, 6명은 연명으로써 그 사실의 철저한 조사 및 이에 기인하는 독립당원 無辜怨殺 등 불상사의 미연 방지를 독립당 중앙(이사회)에 청원하겠다고 말함. 이 항쟁은 당분간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그 되어가는 형편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임"이라고 보고했다.[16] ----> 사견이 들어가지 않은 복사-붙여넣기한 인용문임을 확인했고, 국사편찬위원회 산하에서 인용하였고, 상기 내용을 개인적으로 교차검증 해봤는데 크게 문제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본 인용문은 김구 개인과의 직관성이 뚜렷한 내용이 없으며, 본 김구 문서에 크게 필요치 않은 걸로 보입니다. 굳이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신다면 핵심 한 줄 정도만 인용하는 게 적당해 보입니다.
김구는 안창호의 후견인 옥관빈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56] ----> 적절한 인용임에 동의합니다.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57] ----> 적절한 인용임에 동의합니다.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 피살 사건이 오면직엄순봉안공근, 안경근 등과 협력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경성지부법원 검사정에 보고하였으며 김구는 언급되어 있지않다.[58] ----> 특정한 결론을 유도하는 뉘앙스가 있으므로 '김구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 부분을 삭제하고 나면 본 인용문은 본 김구 문서에서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일본 자료에선 김구가 언급되어 있다.[16][20] ----> 인용문에는 '김구 일파'가 언급된 거지, '김구'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결론은 증거없는 무혐의라 결론났다. ----> 출처가 없습니다. 독자연구일 가능성이 큽니다.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59] ----> C라는 책자에 A가 B했다라는 내용이 출판되지 않았다고 해서 C가 A는 B하지 않았다고 명시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해석을 유도한 부적절한 문장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60]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61] ----> 마찬가지입니다. 출판된 내용을 인용해야지, 출판되지 않은 내용을 마치 출판된 것처럼 하여 주장하는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62]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63]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64]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65]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아닙니다. 출판된 내용을 인용해주시길 바랍니다. 특정한 결론을 유도하는 독자연구로 보입니다.
옥관빈이 친일밀정이라 주장한 이는 정화암으로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66] ("전거"는 증거가 아니다.[67])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68] 그 결과 옥관빈은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증거가 없는 무혐의라 결론이 나왔다. ----> 위인가 아래에서 반박하였듯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점'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독자연구입니다.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 원인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69] ----> 본인이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그리고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구글학술검색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가 아닙니다. 그리고 친일인명사전 측은 증거만 나오면 수정증보판에 언제라도 반영하겠다고 발언하였습니다. 즉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이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는 인사들이 확실한 자료만 제시하면 보유편이나 수정증보판에 언제라도 반영할 수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이 출판된 동시에 어떤 종지부가 찍혔다고 판단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이다.[70]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이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이다.[71] 그에 비해 무혐의는 법률 외 용어이므로 해당 용어개념 사용은 오류가 아니다. [72] ----> 김구 문서에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토론에서만 언급될만한 내용입니다.
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는 무혐의'로 결론이 난 것이다. ----> 법률 외 용어개념으로부터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신 독자연구입니다. 그리고 '결론이 난 것'이라 하셨는데,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이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는 인사들이 확실한 자료만 제시하면 보유편이나 수정증보판에 언제라도 반영할 수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소수파의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13] 2008년 이호룡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73]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14]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37] 2019년 2월 12일 한국일보 보도에는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후략)"라고 기술되었다.[74] ----> '소수파의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이라고 언급하셨는데, 옥관빈사건에 관한 소수파와 다수파를 독자적으로 구분하신 독자연구를 하셨습니다. 그 뒷부분에 대해선 약간 가다듬는 정도 외에는 적절한 인용임에 동의합니다.
기타로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이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여 관계가 좋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933년 서간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술하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옥관빈의 처형 이유로 기술하며 친일파나 밀정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36] ----> (한홍구 (2010년 08월 00일). 《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 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판. 일조각. 209쪽)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며 옥관빈이 친일임을 명시하였습니다.
한홍구는 옥관빈에 대해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36] 고만 서술할 뿐, 학계의 합의에 의하면 "친일"행위 존재 자체는 친일파의 판단 증거가 아니며 "반복성과 중복성·지속성 여부도 주된 참고사항"이며 "친일단체 참여 등 협력행위가 일회적이라면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75] 그러므로 단순히 "친일"행위 언급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는데 한홍구의 논문에선 옥관빈을 "밀정"이나 "친일파"로 기술하는 내용은 없다. ----> 한홍구가 말한 '친일'이 정확히 무슨 의미의 친일인지 밝히려면 한홍구의 논문에서 인용해야 하는 것이지, 한홍구 본인의 설명이 아닌 학계의 합의를 근거로 한홍구 본인이 말한 '친일'을 다른 의미의 친일로 해석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며,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내는 독자연구입니다. 한홍구가 말한 '친일'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명시되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는 국어사전의 1번의미(일본과 친함)와 2번의미(부일배) 둘 다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계의 합의라고 저술한 부분은 출처도 없습니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해 옥관빈이 사살됐는데 김구 일파의 주장에 의하면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했다하며[11]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20] ----> 다듬을 필요는 있지만 적절한 인용문이라 보입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 ----> "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리하면 역사적으로는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다만 학술적 개념으로서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대별할 수 있으나 이 또한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의 범주에 모두 포함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경계선상에 위치한 인물도 존재했다. 중요한 사실은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의 구분이 반드시 죄상의 경중에 따른 것은 아니며, 행위의 성격을 분간하기 위한 유형별 분류일 뿐이라는 점이다."(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친일"은

명사

  •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76]
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파"는
  •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77]
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래 친일, 친일파 ≠ 한국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친일, 친일파(2번 의미)는 차이가 있으며 전문가의 분석없이 비전문가의 가설은 위키백과에서 금지하고 있다. ----> 해당 위키백과 정책 및 지침 제시 바랍니다.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78] 해당 논문의 정의는 표준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용례이다.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 한홍구가 사용한 친일의 의미를 김다혜가 사용한 친일의 의미와 같다고 해석하는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한홍구가 자신이 사용한 친일 용어의 의미를 정의하지 않았으니 한홍구가 사용한 친일의 의미는 국어사전상 2번의미가 아닌 1번의미라고 해석한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79]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80]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 '옥관빈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등에 제외됐다'는 내용이 명시된 문장을 복사-붙여넣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20. 경제

20-1. 일제의 경제침탈정책을 입안 또는 의사 결정을 주도한 자와 이의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자

20-2. 국책 경제 기관(동양척식주식회사ㆍ식산은행 등)과 경제 단체의 간부

20-3. 군수품 제조업체의 책임자

20-4. 기고ㆍ광고ㆍ좌담ㆍ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경제침탈을 합리화하고, 전쟁 물자 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분류기준 경제부문)[81]

친일인명사전의 경제부문 친일파 기준을 확인해보아도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친일파(반역자/부역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옥관빈의 경제활동은 중국에서는 한간이 아닌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 평가받으며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기준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 위에서 반박한 내용들과 겹치는 걸로 보이므로 답변 생략합니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 옥관빈 친일파에 대한 출판물의 출판된 내용을 인용해오시길 바랍니다. 독자적인 해석 및 결론은 자제 바랍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아래는 위키백과 정책 및 지침 중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 내용 중 일부입니다.

문서 편집자는 종종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실수를 합니다.

만약 A와 B가 공개 발표된 믿을 수 있는 출처의 자료라면, 이 둘을 조합하여 새로운 결론 C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만드는 한 예이며, 이는 독자 연구가 될 것입니다. “A이고 B이니까 C”라는 주장을 쓰려면, 먼저 해당 내용이 믿을 수 있는 출처를 통해 공개 발표되어야 합니다. 즉, 어떠한 해석도 먼저 믿을 수 있는 출처를 통해 공개 발표되어야만 위키백과에 실을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독자_연구_금지#공개_발표된_자료를_근거로_새로운_결론을_이끌어_내는_것

위의 예시와 유사하게, 118.216.129.147님은 A이고 B이니까 C라는 주장을 많이 하고 계시고(예> 한홍구는 옥관빈을 친일이라 했지만--학계가 친일 용어는 신중해야 된다고 했으니--한홍구가 말한 친일은 나쁜 의미의 친일이 아니다. 예2> 한홍구는 옥관빈을 친일이라 했지만--한홍구는 옥관빈을 밀정이라 하진 않았으니--옥관빈은 밀정이 아니다. 예3>한홍구가 친일이라는 용어를 썼지만--김다혜는 친일이 나쁜 의미가 아니라고 했으니--한홍구가 쓴 친일의 뜻은 나쁜 의미가 아니다. 등등), 심지어 A 또는 B에는 출처가 인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118.216.129.147님은 'A문헌에 B는 C이다라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B는 C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패턴도 많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편집은 위키백과:문서 훼손에 저촉되므로 주의하셔야 됩니다. 한 달 전부터 말씀 드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 118.216.129.147님과 저는 한 달 전과 거의 똑같은 문제로 똑같은 편집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의견 수렴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118.216.129.147님에게 제가 기여한 11월 24일 판(김구 문서 Jhysoccer 11월 24일 기여) 중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편집을 했다는 건지 정확히 지적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님이 기여한 11월 20일 판(김구 문서 118.216.129.147 11월 20일 기여)에 대해 했던 방식 그대로 제 최신 기여본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해주시길 바랍니다. --Jhysoccer (토론) 2020년 11월 24일 (화) 17:24 (KST)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쓰지(中野勝次) 인용은 제가 한게 아니라 Jhysoccer가 한겁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10:40 (KST)
뭔가 이상해서 읽어보니 한달전에 토론했다고 하셨는데 전 한달전에 Jhysoccer과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토론란을 읽어도 토론 행적 없습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10:43 (KST)

저번부터 '친일파증거 없다'란 설명을 '친일파 아니다'로 왜곡하시네요[편집]

저번부터 '친일파증거 없다'란 설명을 '친일파 아니다'로 왜곡하시네요.
저번엔 타인의 무혐의란 서술을 무죄라 왜곡하시는데 이번엔 '증거없다'를 '하지 않았다'로 왜곡하시네요. "C라는 책자에 A가 B했다라는 내용이 출판되지 않았다고 해서 C가 A는 B하지 않았다"서술이 전혀 없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서술을 하셨다고 계속 왜곡하시네요.
또한 118.216.129.147님은 'A문헌에 B는 C이다라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B는 C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패턴도 많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편집은 위키백과:문서 훼손에 저촉되므로 주의하셔야 됩니다. 한 달 전부터 말씀 드렸던 것 같습니다.
라는 서술했다고 왜곡하시는데 그런 서술 존재하지 않습니다.
친일파가 아니란 증거가 없으니 '친일파'란 서술은 Argument from ignorance라서 오류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Argument_from_ignorance)
물론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니 '친일파가 아니다'는 주장도 Argument from ignorance입니다.
그런데 Jhysoccer이 부정한 주장 어디에도 'NO 친일파'란 서술이 없습니다. '친일파 증거없다'는 내용만이 있습니다.
'친일파 아니다'가 아니라 '친일파 증거없다'가 서술된더니 타인의 서술 왜곡 그만하십시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10:20 (KST)
편집본에 존재하지 않는 '행위없음'서술이 아니라 '증거없음'이 대다수 견해란 사실을 부정할 증거 가져오세요[편집]

편찬위원회에 의하면 제외된 인물은 - 객관적 증거없음 - 기준부합하지 않음

이 팩트입니다.

사전 수록은 오로지 선정기준에 따를 뿐이며 일부의 형평성을 잃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전에는 다수의 좌파 인물이나 월북 인사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는 인사들이 확실한 자료만 제시하면 보유편이나 수정증보판에 언제라도 반영할 수 있습니다.

https://www.minjok.or.kr/archives/63785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사람 =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고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인물

"증거없음"의 증거가 대다수란 증거가 명확합니다."증거없음" 견해가 대다수란 증거는 친일인명사전이고요.

"행위없음"이 아니라 "증거없음" 견해를 부정할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행위가 있다 없다 여부는 argument from ignorance [82] 이라 오류라서 근거로 제시 못 합니다. 이에비해 '행위여부'가 아니라 '증거의 실존여부'는 그런 오류 문제 없습니다. "증거없음"은 친일인명사전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입니다.

행위없음이 아닌 "증거없음"을 반박하세요.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4일 (금) 08:24 (KST)


제 최근 편집본에 보시면 몇 개의 논문들을 인용했는데, 그 인용자료들을 보시면 옥관빈을 친일파, 밀정, 그리고/또는 변절자라고 저술한 학자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그 학자들의 논문들은 KCI급 논문들입니다. 그 말은 해당 논문들이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교차검증되어 나왔다는 뜻입니다. 님의 저술은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 아님'이라고 명시된 것도 아니고 '미등재'라는 사실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 없음'을 기반으로 한 주장은 님 말마따나 argument from ignorance에 불과하므로 위키백과의 성격에 적절치는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증거 없음'을 기반으로 한 장황한 저술 부분은 한 두 줄 정도로만 축약하는 것이 적절해보입니다.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1:00 (KST)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입니다." 대다수의 학자는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친일파 아니다'가 아니라 '친일파란 객관적 증거가 없다.', '친일파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가 다수입니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34 (KST)
제외된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없다',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가져오셨습니다.[편집]
본인이 인정하셨네요. 친일인명사전에 '증거없어서'제외됐다고요.
친일인명사전 측은 증거만 나오면 수정증보판에 언제라도 반영하겠다고 발언하였습니다. 즉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이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는 인사들이 확실한 자료만 제시하면 보유편이나 수정증보판에 언제라도 반영할 수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이 출판된 동시에 어떤 종지부가 찍혔다고 판단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
등재하지 않는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옥관빈은 친일파란 객관적 증거가 없다' 이것에 대해 반박할 증거 없으면 결국 '증거없음'이 사실입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10:59 (KST)

그리고 죄송합니다만 제발 "출판된 동시에 어떤 종지부가 찍혔다고 판단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그런 발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발언하지 않은 것에 대한 조작 그만하시고 '증거없음'을 반박하십시오.
다른 이용자에게도 '무죄라 했다'는 거짓말을 편집요약란에 하시더니 인제 저한테까지 '하지 않았다'는 서술을 했다고 거짓말 하시고 계시는군요.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증거없음' 서술을 반박하세요.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11:12 (KST)
편집본에 존재 하지않는 친일파 '행위존재'여부가 아니라 친일파 '분류가능'여부의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독자연구 금지엔 "개념"도 포함)[편집]
독자 연구(獨自硏究, Original research)는 위키백과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서, 공개 발표되지 않은 사실, 주장, 개념, 진술 또는 이론을 의미합니다.
위키백과 독자연구 금지 문서 어디에도 독자연구 기준을 "사실"에 만 한정하지 않았으면 "개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8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은 예비후보부터 제외되었습니다.[84]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85]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86]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습니다.[87]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습니다.[88]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입니다.
전부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행위존재 여부가 아니라 분류가능여부를 설명하십시오.
분류하지 않은 것이 대다수란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부정하실거면 행위존재여부가 아니라 분류가능 여부에 대해 반박할 증거를 가져오십시오.. "행위존재"가 아니라 "분류가능"여부 입니다.


님은 지금 자신이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저술했고 '친일파가 아니다'고 저술한 건 아니니 괜찮다고 하셨는데, 제가 봤을 땐 읽는 독자의 가치관에 따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는다'와 '친일파가 아니다' 두 문장이 동일한 의미로 여겨질 소지가 큽니다. 저부터가 그렇게 보이니까요. 위키백과:모호한 표현을 삼가 주세요

이렇게 의심받고 있거나 의심받을 만한 문서 내용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출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출처가 발견되지 않아서, 글쓴이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독자 연구”로 간주합니다. 당신이 쓴 글이 독자 연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과 같은 주장 또는 논거를 제시하는 공개 발표된 믿을 수 있는 출처를 밝히는 것뿐입니다(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1:07 (KST)

"두 문장이 동일한 의미로 여겨질 소지가 큽니다" 소지가 아니라 논리적 증거를 가져오세요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36 (KST)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이란 민문역의 실제 발언 문맥 왜곡 증거[편집]

좌익이나 북한과 관련된 인사들에게는 관대하다는 비판에 대해서사전 수록은 오로지 선정기준에 따를 뿐이며 일부의 형평성을 잃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전에는 다수의 좌파 인물이나 월북 인사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는 인사들이 확실한 자료만 제시하면 보유편이나 수정증보판에 언제라도 반영할 수 있습니다.

[89]

실제로는 "좌익이나 북한과 관련된 인사들에게는 관대하다는 비판"에 대한 반박입니다.
옥관빈은 좌익도 아니고 북한관련 인물도 아니라 해당되는 사례가 아닙니다. 즉 '좌익과 북한 관련 인사들'의 친일등재 여부에 대한 반박입니다.
'등재되지 않은 특정 인물도 친일파로 주장할 수 있다'는 발언의 존재여부는 없고 '객관적 증거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등재되지 않은 것'이란 내용입니다. 그러니 해당자료는 '등재되지 않은 특정 인물도 친일파로 주장할 수 있다'는 서술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외된 인물들은 "부당한 오명"을 피하기 위함이 목적이라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래확인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11:07 (KST)
친일인명사전에 제외되는 인물에 대한 공식표명[편집]
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이의신청 사유가 다소라도 개연성이 있어 보이면 최선을 다해 확인하고자 했다. 설령 이의신청이 없더라도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검증을 거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여 수록이 유보된 인원은 이의신청을 통해 보류된 13명을 포함하여 총 382명에 이른다.

[90]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이 이유라고 분명 서술했습니다. 이게 제외되는 인물들에 대한 공식이유입니다.

'친일파인 것 같지만 증거가 부족하다'가 아니라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없도록'이 이유입니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인물보고 친일파라 주장하는 건 인명사전 왜곡인용이네요.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4일 (금) 08:34 (KST)

토론 내에서 Jhysoccer의 친일인명사전 자료 왜곡 인용 증거[편집]

Jhysoccer가 친일인명사전 자료를 왜곡해서 인용했습니다.

Jhysoccer의 2020년 11월 24일 (화) 17:24 인용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 ----> "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정리하면 역사적으로는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다. 다만 학술적 개념으로서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대별할 수 있으나 이 또한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의 범주에 모두 포함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경계선상에 위치한 인물도 존재했다. 중요한 사실은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의 구분이 반드시 죄상의 경중에 따른 것은 아니며, 행위의 성격을 분간하기 위한 유형별 분류일 뿐이라는 점이다."(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 2020년 11월 24일 (화) 17:24 (KST)

실제 친일인명사전의 내용

"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18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91] 친일인명사전에서 서술된 인식자는 일반인

그리고 문서에서 실제 서술된 양측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해 옥관빈이 사살됐는데 김구 일파의 주장에 의하면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했다하며[11]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20]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

"김구 일파"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니깐 일반인에 전혀 해당되지 않음.

일반인의 국어사전 의미

"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

https://ko.dict.naver.com/#/entry/koko/f68ff92ab0ae437f8f22c30fb4da4ac0 "김구 일파"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특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절대 조선에서 "일반인"이 아닙니다. 애초에 일본인인데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인데 일본인은 일제에게 침략당한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예 해당되지 않습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증언을 친일파의 증거로 인용해놓고 자료를 조작해서 인용하십니까.


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은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 https://ko.dict.naver.com/#/entry/koko/28e944fae422448d884eb1cc04c87768

두가지 의미라 나옵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친일이 민족반역자, 부역자란 증거 가져오십시오.

저는 의미가 두가지란 증거 가져왔습니다. 의미가 한가지란 증거를 가져오십시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4일 (금) 08:34 (KST)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친일의미는 두가지라 설명[편집]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두가지 의미라 나옵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따져보면 반민족행위자란 민족을 반역한 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민족을 하나의 실체로 인정할 경우 민족반역자는 근대 민족이 형성된 이후 반민족행위자는 친일세력 외에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 매우 넓은 용어라 하겠다. 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 다"

http://db.history.go.kr/introduction/intro_an.html 에서 자료해제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an&fileName=intro_an.pdf

"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다른 두가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은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

https://ko.dict.naver.com/#/entry/koko/28e944fae422448d884eb1cc04c87768 두가지 의미라 나옵니다.

친일이 한가지 의미라는 증거가 없네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친일이 민족반역자, 부역자란 증거 가져오십시오. 저는 그런 주장을 한 적 없으니 가져올 이유가 없고 '친일 의미가 두가지'라 설명했습니다.

그 증거가 국사편찬위원회에 국어사전 복사붙여넣기 입니다. 독자연구 여지가 없습니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4일 (금) 08:40 (KST)

서술에 독자연구나 중립위반 여부 사실관계에 대한 토론[편집]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삼덕양행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8권 한인애국단 Ⅰ, 2008년 11월)[92]

옥관빈

1933년 8월 1일 옥관빈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즉시 양여주(楊汝舟, 본명 오면직 吳冕植), 엄순봉(嚴舜奉, 일명 엄형순)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산하 흑색공포단 소속이었다.[93][11]

1933년 8월 9일 사건의 진상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韓人除奸團(한인제간단)'이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단체는 옥관빈에게 6개조의 죄목이 있다면서 '옥관빈이 중국 국민당과 상해시민연합회의 요직을 맡으면서 중국의 군사정치정참을 하였다'고 주장했다.[94][13][14]

피살 당시 옥관빈은 독일화학약품(獨逸化學藥品)의 동양전매특허를 맡아 삼덕양행(三德洋行)을 경영하여 100여 만원의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종종 옥관빈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청하였는데, 옥관빈은 "너희만 일하겠느냐, 나도 돈 버는 목적이 있다"하고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언론은 옥관빈의 이러한 태도가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을 사서 암살을 당한 것으로 보았다.[95]

1933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상해 주재 사무관 나카노 가쓰지(中野勝次)는 이 사건을 "김구 일파의 애국단 대 이곳 한국독립당의 알력은 최근 마치 평안도파 대 황해도파의 대립과 같은 색채를 띠어 왔고 점점 더 격화하는 형세임은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음. 원래 이 항쟁의 연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독립당 측이 ‘이른바 애국단이라는 것은 우리 독립당의 일부분적 단체인 성질을 띠는 것으로, 애국단이라는 명의로써 헛되이 허장성세할 것이 아니라 一國一黨의 대세에 준거하여 독립당이 이를 지휘해야 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데 대하여 김구 일파의 애국단 일파에서는 ‘우리 애국단은 東京 및 신공원의 폭탄사건, 大連 사건 등 위대한 공적을 거두었는데 이 모두 우리의 자발적 행동이며 그 위대한 행동은 결코 멸시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범위의 확충과 아울러 바야흐로 혁명운동의 선봉임을 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라는 주장을 하는 데에 기인하고 있어서 도저히 당분간 원만한 결합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됨. 그간 독립당 측에서는 행정의 가장 중요한 구역인 上海 일대가 李春山의 체포 이래 유야무야 형세가 되어 시들하고 느른해져 부진한 경향이 있을 때 한편 애국단 방면에서 근래 부하에게 비밀리에 위촉하여 프랑스조계 일대에 불온 세력을 더하려는 기세가 있음. 安恭根, 安敬根의 이면적 활동에 대해 金東宇, 金玄九 등은 그 이면적 운동자로서 활약하는 듯하며, 독립당원으로서 몰래 애국단에 들어가 행동하려는 자가 있는 상황이라 하여 우려하고 있으며,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애국단 일파가 玉觀彬 외 車利錫, 金弘叙, 玉成彬, 李星鎔, 崔錫淳도 암살하려고 예정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도 자못 우려하여 지난달 15일의 독립당 區會에서도 대 애국단과의 알력 완화에 관해 결의한 사정이 있음. 그런데 최근 전기 차리석 등 피살 예정의 소문이 있는 5, 6명은 연명으로써 그 사실의 철저한 조사 및 이에 기인하는 독립당원 無辜怨殺 등 불상사의 미연 방지를 독립당 중앙(이사회)에 청원하겠다고 말함. 이 항쟁은 당분간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그 되어가는 형편에 주의를 기울이는 중임"이라고 보고했다.[16]

김구는 안창호의 후견인 옥관빈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96] 1933년 9월 20일 김규식이용직, 한길수에게 다음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냈다. "상해에서는 옥관빈과 유주발(유인발) 등 악한들을 모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인 김구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비록 김구가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이 일을 모두 자신이 한 것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97] 1936년 3월 23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 피살 사건이 오면직엄순봉안공근, 안경근 등과 협력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경성지부법원 검사정에 보고하였으며 김구는 언급되어 있지않다.[98] 하지만 다른 일본 자료에선 김구가 언급되어 있다. [16][20]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결론은 증거없는 무혐의라 결론났다.

백범일지에는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99]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8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은 예비후보부터 제외되었다.[84]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85]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86]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87]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88]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옥관빈이 친일밀정이라 주장한 이는 정화암으로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100] ("전거"는 증거가 아니다.[101])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102] 그 결과 옥관빈은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증거가 없는 무혐의라 결론이 나왔다.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 원인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103]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이다.[104]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이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이다.[105] 그에 비해 무혐의는 법률 외 용어이므로 해당 용어개념 사용은 오류가 아니다. [106]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는 무혐의'로 결론이 난 것이다.

소수파의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2008년 이호룡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107]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14]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37] 2019년 2월 12일 한국일보 보도에는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후략)"라고 기술되었다.[108]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13] 그러나 손세일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이다.[109]

기타로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이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여 관계가 좋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933년 서간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술하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옥관빈의 처형 이유로 기술하며 친일파나 밀정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36] 한홍구는 옥관빈에 대해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36] 고만 서술할 뿐, 학계의 합의에 의하면 "친일"행위 존재 자체는 친일파의 판단 증거가 아니며 "반복성과 중복성·지속성 여부도 주된 참고사항"이며 "친일단체 참여 등 협력행위가 일회적이라면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110] 그러므로 단순히 "친일"행위 언급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는데 한홍구의 논문에선 옥관빈을 "밀정" "밀고"나 "친일파"로 기술하는 내용은 없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해 옥관빈이 사살됐는데 김구 일파의 주장에 의하면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했다하며[11]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20]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친일"은

명사

  •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111]

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파"는

  •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112]

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래 친일, 친일파 ≠ 한국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친일, 친일파(2번 의미)는 차이가 있으며 전문가의 분석없이 비전문가의 가설은 위키백과에서 금지하고 있다.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113] 해당 논문의 정의는 표준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용례이다.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114]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115]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

20. 경제

20-1. 일제의 경제침탈정책을 입안 또는 의사 결정을 주도한 자와 이의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자

20-2. 국책 경제 기관(동양척식주식회사ㆍ식산은행 등)과 경제 단체의 간부

20-3. 군수품 제조업체의 책임자

20-4. 기고ㆍ광고ㆍ좌담ㆍ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경제침탈을 합리화하고, 전쟁 물자 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분류기준 경제부문)[116]

친일인명사전의 경제부문 친일파 기준을 확인해보아도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친일파(반역자/부역자)에 해당하지 않는다. 옥관빈의 경제활동은 중국에서는 한간이 아닌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 평가받으며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기준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옥관빈의 암살범을 찾으려는 옥성빈도 암살됐다. 역사학자가 아닌 언론인인 손세일은 옥성빈도 친일파라 주장하였다. [117]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99]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8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성빈이 예비에서 제외되었다.[84]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85]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86] 편찬결과물에 옥성빈이 제외되었다.[87]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88]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증거가 없는 무혐의라 결론이 나왔다.

독자연구가 전혀없습니다.
위 서술에는 '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없고 '증거없음'이라고 서술됐습니다.
'하지 않았다'란 존재하지 않는 서술이 아니라 '증거없음'을 반박하십시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3일 (목) 08:17 (KST)


님 말마따나 '증거 없음'을 기반으로 한 서술은 augument of ignorance이므로 님의 말에 따르면 '오류'입니다.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1:16 (KST)


augument from ignorance에 해당되는 부분 삭제 동의[편집]

118.216.129.147 사용자님께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 편집본에 대한 반박은 하지 않고 오직 본인 편집본에 대한 옹호만 하고 계신데, 이는 양 편집자가 합의과정에 이르기보다는 본인 편집만을 지키겠다는 즉 협업정신 거부로 비춰질 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제 질문에도 좀 답변하시면서 토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증거가 없다'를 근거로 한 주장이나 논리구조는 118.216.129.147님이 직접 말했듯이 augument from ignorance입니다. 그리고 님은 augument from ignorance가 '오류'라고 하셨죠. 그런데도 스스로 augument from ignorance 하고 계십니다. '증거가 없다'는 맥락의 문단의 끝부분마다 "결론이 났다"고 단정적인 표현을 덧붙이셨으며, 이는 '친일파라는 증거가 없다'를 '친일파가 아니다'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결론이 났다"고 저술하였으면서 그 저술에 출판된 출처를 제시하지 않으신 것은 물론이고요. 님도 augument from ignorance가 오류라 하시고, 저도 augument from ignorance을 삭제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증거가 없으'면 '증거가 없다' 한 마디 기술하고 끝나야지, 거기에서 부차적인 해석이 이뤄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막상 그런 augument from ignorance를 지울 때마다 왜 지웠냐고 따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118님은 거의 한 달 전부터 문맥상 '김구가 애먼 사람을 친일파로 취급하고 그의 암살에 가담했다'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위험한 저술을 반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출처를 인용하라고 몇 번을 말씀 드렸는데 절대 출처를 달지 않고 계십니다. 정확한 출처를 달지 않고 갑자기 국어사전을 인용하여 해석하거나 친일인명사전 규정을 인용하여 해석하는 등 "공개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 즉 독자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에 따르면 "의심받고 있거나 의심받을 만한 문서 내용에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출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출처가 발견되지 않아서, 글쓴이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독자 연구”로 간주합니다. 당신이 쓴 글이 독자 연구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과 같은 주장 또는 논거를 제시하는 공개 발표된 믿을 수 있는 출처를 밝히는 것뿐입니다." 118님은 명백한 독자연구를 하고 계시며 그 수위도 위험합니다.

위키백과는 자신의 논리구조를 펼치는 곳이 아니라 백과사전입니다. '옥관빈이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한 저명한 논문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가져오시면 그만인 것을, 그러지 못하시고 기타 자료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뒤 그 해석을 근거로 주장을 관철하시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위키백과:독자 연구 금지 문서를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정화암과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증언(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399페이지) 등 옥관빈이 친일파라는 '증거는 있습니다'. 또한 옥관빈을 '친일파', '밀정', '변절자'로 기술한 KCI급 논문들과 신뢰할 수 있는 출처들도 많이 있습니다. ([2], [3], [4], [5] 등등)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11일 (금) 14:34 (KST)

서술내용은 '친일파 여부'가 아니라 '객관적 증거 여부'입니다. '증거 존재'라는 판단이 대다수란 증거를 요구합니다.[편집]

'증거가 있다'는 소수견해가 대다수 학자는 '증거가 없다'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선 등재되지 않는 인물은 '증거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전 수록은 오로지 선정기준에 따를 뿐이며 일부의 형평성을 잃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전에는 다수의 좌파 인물이나 월북 인사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입니다.[118]

"등재되지 않는 대상은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등재되지 않는 대상도 객관적 증거가 있다"(X)
"등재되지 않는 대상도 증거는 있는데 결정적 증거가 없다"(X)
"등재되지 않는 대상은 객관적 증거가 없거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O)
명확히 등재되지 않는 대상은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119]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습니다.[86]
그리고 등재되지 않는 인물들은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분명히 발표했습니다.
'증거가 있다'는 학자가 대다수란 증거 제시바랍니다.
'증거가 있다'는 학자는 150여명보다 대다수거나 비슷하다는 증거 제시 요구합니다.
저는 지금 '친일파 아니다'가 아니라 '객관적 증거가 없다'란 판단이 대다수란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44 (KST)

중립적 관점은 본문 이름공간의 각 문서에서 확인 가능한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나온 모든 중요한 관점을 각 관점의 중요도에 비례하여 공정하게 나타낼 것을 요구합니다.[2] 적절한 비중으로 작성하고 부적절한 비중으로 쓰지 말라는 이야기는 폭넓게 인정되는 견해나 다수가 지지하는 견해를 극히 적은 사람이 지지하는 의견이나 소수 의견과 동등한 비중으로 많이 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위키백과:중립적 시각
친일파이다/친일파가 아니다란 이분법으로 주장하시는데 친일파 여부가 아니라 '객관적 증거 여부'가 서술됐으며 편찬위에서 등재되지 않는 인물이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등재되지 않은 인물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친일파 아니다'가 아니라 '객관적 증거 존재 여부'에 대한 반박을 요구합니다.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48 (KST)

옥관빈의 실제국적과 옥관빈의 조국의 평가가 지속적으로 삭제되고 있습니다[편집]

학계를 증거로 주장하시면 중국내 평가를 지속적으로 삭제되고 있습니다. 옥관빈은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120] 는 서술이 이유없이 삭제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에서 중국학계는 서술금지란 규칙없습니다만 중국의 "애국자"평가를 무슨 근거로 삭제하십니까?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8:51 (KST)
위키백과 어디에도 출생한 곳으로 인물의 국적으로 정의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옥관빈은 법적으로 중국인이었고 실제로 중국 국민당 간부였으며 중국 학계에서 "애국적인 실업가"로 평가받는 증거도 서술됐습니다. 중국인이라는 국적과 행적이 명확한 증거가 서술됐음에도 정당한 이유없이 삭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인으로 서술해야할 규정은 없고 오히려 객관적 증거에 의하면 옥관빈은 명확한 중국인 입니다.
증거가 명확한 타인의 조국을 이유없이 삭제하고 있습니다. 118.216.129.147 (토론) 2020년 12월 17일 (목) 09:01 (KST)

독자연구임. 옥관빈이 '법적 중국인'이 됐다고 해서 '중국인 혈통'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음. 옥관빈은 '조선인 혈통'임.[편집]

안창호도 중국으로 귀화한 바 있고 그걸 입증할 사료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그 당시도 오늘날도 그 누구도 안창호를 중국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옥관빈이 중국으로 귀화했다고 해서 중국인으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옥관빈은 1928에 '법적으로' 중국인이 됐던 것 뿐입니다. 혈통은 조선인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옥관빈이 중국인이고 저술하는 것은 독자연구입니다. 옥관빈이 중국에 귀화했다는 사실은 그 사실만 적시하는 것으로 끝나야지, 그걸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옥관빈이 마치 완전한 중국인인 것처럼 저술해서는 안 됩니다.

옥관빈은 1891에 한국에서 태어났고(본적: 평남 [6]) 1928에 중국에 귀화했지만 1933에 죽어서는 평양에 묻혔습니다. 옥관빈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 37년을 살았고 중국인으로서 5년을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한국에 묻혔습니다. '완전 중국인'이라고 하기엔 중국에서 산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습니다.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23일 (수) 13:50 (KST)

118.216.129.147님이 저술한 부분에 '출처 필요' 및 '독자연구?' 표시를 달았으니 해당 부분 보완 바랍니다[편집]

@118.216.129.147: 'augument from ignorance는 오류'라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augument from ignorance를 기반으로 한 저술은 반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augument from ignorance를 기반으로 한 저술을 계속 복구시키고 계십니다. 지금의 토론도 전혀 생산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깔끔하게 님의 저술 부분에 '출처 필요' 표시와 '독자연구?' 표시를 달아놨으니 해당 부분을 보완 해주시겠습니까? --Jhysoccer (토론) 2020년 12월 22일 (화) 20:58 (KST)

  1. “玉觀彬의 暗殺犯人에 관한 件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표준국어대사전”. 2020년10월24에 확인함. 
  3. “표준국어대사전”. 2020년 10월 24일에 확인함. 
  4. 김다혜, 친일파 및 친일 행위 내용에 관한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서술 분석,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2018, 10~11
  5. “네이버백과사전”. 2020년10월24일에 확인함. 
  6. “표준국어대사전”. 2020년10월24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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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김구의 지령 받고 이중첩자로 활약한 애국지사 한도원”. 한국일보. 
  109. [7]"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10. “『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 《친일인명사전》. 2020년 11월 20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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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표준국어대사전”. 2020년 10월 24일에 확인함. 
  113. 김다혜, 친일파 및 친일 행위 내용에 관한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서술 분석,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2018, 10~11
  114.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66
  115.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
  116. “친일파를 분류하기 위해 모두 24개 분야를 설정”. 《친일인명사전》. 2020년 11월 20일에 확인함. 
  117. 손세일. “蔣介石과 面談하고 洛陽軍官학교에 韓人특별반 설치”. 《조선일보》. 2020년 11월 24일에 확인함. 
  118. “좌익이나 북한과 관련된 인사들에게는 관대하다는 비판에 대해서”. 《친일인명사전》. 2020년 12월 3일에 확인함. 
  119.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472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120. 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