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브리족

킴브리족(라틴어: Cimbri, 그리스어: Κίμβροι 킴브로이[*])은 유럽의 고대 부족 중 하나이다. 고대 작가들은 이들을 켈트족계-갈리아족계, 게르만족계 심지어는 킴메르족계 등 다양하게 묘사하였다. 일부 고대 사료에서는 이들이 몇몇 고대 사료에서 킴브리반도로 일컬어진 윌란반도에 거주했다고 나타낸다. 이들이 사용한 언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물은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게르만어였을 것이라 주장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켈트어였을 것이라고 한다.
튜튼족 및 암브로네스족 등과 함께 킴브리 전쟁 기간인 서기 113년부터 101년에 걸쳐 로마 공화정과 싸웠다. 킴브리족은 초기에 성공을 거뒀는데, 특히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의 대군을 퇴각시켜내었다. 그 후에 이들은 갈리아, 히스파니아 등 넓은 지역들을 약탈하였다. 이탈리아반도에 대한 침입을 시도하던 기원전 101년에 킴브리족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말았고 자신들의 왕인 보이오릭스도 전사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이중 포로 일부가 제3차 노예전쟁 당시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명칭
[편집]'킴브리'(Cimbri)라는 명칭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 이론[1]에서는 어원이 '거주하다'를 뜻하는 인도유럽조어 tḱei- (고대 그리스어: κτίζω, 라틴어: sinō)에서 발생한, '집'을 뜻하는 tḱoi-m- (영어의 home)이 다시 변화한, '거주민'을 뜻하는 *tḱim-ro-에서 비롯했다고 하며, 이에 따라 게르만어 *himbra-는 슬라브어로 '농부'를 뜻하는 'sębrъ'(크로아티어, 세르비아어의 sebar, 벨라루스어의 сябар sjábar)와 정확한 동계어에 해당한다.
또한 이 이름은 '가장자리'를 뜻하는 'kimme'와도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즉 '해안의 사람들'을 의미한다.[2] 마지막으로 고대 이래, 킴브리라는 명칭은 킴메르족과도 연루되어 있다.[3]
덴마크의 힘멜란 (고대 덴마크어 Himbersysel) 지방의 명칭은 킴브리족의 변형 형태라고 주장되고 있다.[4] 이러한 주장에 의거하면, '킴브리'(Cimbri)에서 'c'는 그림의 법칙 (인도유럽조어 'k' > 게르만어 'h') 이전 옛 형태이다. 이러한 주장 대신, 라틴어 명칭 'c-'는 익숙지 않은 게르만조어 h를 [x]로 표기하려고 한 시도를 나타내며 (라틴어에서 'h'는 [h] 발음이지만 당시 구어에서는 점차 묵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아마 켈트어 통역가 덕분일 것이다 (이런 켈트어 매개설은 튜턴족 이름의 한 어원설인 게르만어 Þeuðanōz가 라틴어 Teutones로 바뀐 이유도 설명해 줄 수 있다).[출처 필요]
명칭들의 유사성으로 인해, 킴브리족은 떄때로 웨일스인들의 자칭어인 킴리(Cymry)와도 연관 지어진다.[5] 하지만, 킴리는 동포를 의미하는 브리튼조어 *Kombrogi (참조 Allobroges)에서 비롯했으며, 언어학적으로 킴브리와는 관련이 없다.[6]
역사
[편집]기원
[편집]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킴브리를 윌란반도에서 기원했다고 보지만, 고고학자들은 초기 철기 시대에 윌란반도에서 대규모의 이주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기원전 2세기 또는 1세기에 힘멜란의 늪지에 매장되어 있던 군데스트룹 가마솥은 동남 유럽과 어느 정도의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주나, 이 접촉이 기원전 1세기 로마에 대한 킴브리족의 군사 원정과 연관되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북유럽과 영국제도의 사람들이 매년 겨울에 상품과 자원들이 교역되고 문화 간 결혼이 이뤄지던 오늘날 이베리아반도와 남프랑스가 있는 남쪽을 향한 이주에 동참한 것이 알려져 있다.[7]
북방 본토 옹호자들은 킴브리족과 윌란반도를 관련시킨 그리스 및 로마 사료를 제시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제26장)에 따르면, 킴브리족은 서기 1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도 이 지역에서 여전히 발견되었다:
내 함대는 라인강 하구에서 동쪽으로 항해하여 킴브리족의 땅에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은 그때까지 어떤 로마인도 육로나 해로로 도달한 적이 없는 지역이었으며, 와 같은 지역에 사는 킴브리족, 카리데스족, 셈노네스족 및 다른 게르만족 등이 사절을 통해 나와 로마인들에 대한 우정을 요청했다.
동시대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킴브리족이 추정 상 '킴브리반도'라는 곳에서 게르만족으로서 존재했음을 확인해주었다 (이들은 북해 옆에서 거주했었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전해진다):
킴브리족에 대해, 전해내려온 일부는 부정확한 것들이고 또 어떤 것은 지극히 개연성이 낮다. 예시로, 그 누구도 그들이 반도를 거주지로 삼고 살다가 거대한 밀물 때문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 방랑하며 해적 같은 민족이 되었다는 식의 이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은 이전부터 터 잡고 있던 곳에 터 잡고 있으며, 자신들의 땅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솥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우정 및 과거 적대 행위에 대한 용서에 대한 간청과 함께 선물로 보냈으며그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지자 그들은 고향으로 배를 타고 돌아갔으며, 하루에도 두 번씩 일어나는 자연스럽고 영원한 현상 때문에 분노하여 고향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한때 비정상적으로 큰 밀물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날조처럼 보이는데, 바다가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을 때에는 수위가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서, '킴브로이'(Kimbroi)는 윌란반도 최북단,[9] 즉 오늘 림 협만 남쪽 힘멜란에 위치했다 (당시에는 피오르드 북쪽의 벤쉬셀튀섬이 여러 지역으로 이뤄진 섬이었다 ).
이주
[편집]기원전 100년 이전 어느 시기 다수의 킴브리족과 더불어 튜턴족과 암브로네스족 등이 동남쪽으로 이주하였다. 보이족과 다른 켈트 부족 등과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들은 기원전 113년경 노리쿰에 모습을 드러내며, 로마의 동맹 중 하나인 타우리스키족의 영토를 침입했다.
타우리스키족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의 요청으로, 이들은 물러났으나, 결국 속임수에 넘어가 노레이아 전투에서 공격을 받았고, 그곳에서 로마군을 격파했다.[10] 교전 중이던 양 측을 갈라놓은 폭풍우만이 로마군을 완전한 섬멸로부터 구해냈다.
갈리아 침입
[편집]이때 이탈리아로 향하는 길은 열려있었으나, 이들은 갈리아가 있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로마인들과 자주 충돌했으며, 대체로 패한 쪽은 로마였다. 기원전 109년, 킴브리족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지역 지휘관이던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휘하의 로마군을 격파했다. 기원전 107년에는 집정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휘하의 또다른 로마군을 격파해냈고, 집정관 롱기누스는 킴브리족의 동맹 중 하나이던 티구리니족과 부르디갈라 전투 (오늘날 보르도)에서 교전 중 전사하였다.
로마 공화정 침공
[편집]기원전 105년이 되어서야 킴브리족은 로마 공화정 공격 계획을 세웠다. 론강에서 킴브리족은 로마군을 격퇴해냈다. 로마 지휘관 간 불협화음으로, 프로콘술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과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등이 로마군의 협동을 저해하였고 이에 따라 킴브리족은 처음에는 군단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를 패퇴시켰고 이후에는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카이피오와 막시무스에 재앙적인 패배를 가져다주었다. 로마군은 리비우스에 따르면 많게는 80,000명을 잃었으며, 몸젠은 (저서 로마사에서) 이 수치가 보조 기병과 비전투원들을 제외한 것이며, 이들을 포함하면 총 손실은 약 112,000명에 가까워진다고 보았다. 다른 추정치에서는 이보다 적지만, 어떤 기록을 보더라도 대규모 로마군이 패주한 것은 분명했다.
로마는 충격에 빠졌고, '킴브리족의 공포'(terror cimbricus)가 속담이 되기도 했다. 모두가 로마의 성문 앞에서 '새로운 갈리아족'을 곧 보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필사적인 조치들이 시행되었으며, 과거 유구르타를 제압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의 헌법에 반하게 앞으로 5년간 (기원전 104년~100년)의 집정관 및 최고 지휘권자로 선출되었다.
패퇴
[편집]

기원전 104년~103년, 킴브리족은 이베리아반도로 방향을 돌려 그곳에서 광범위 한 약탈을 벌이다가 켈티베리아족 연합의 저항을 마주치게 되었다.[11] 패배를 한 킴브리족은 갈리아로 돌아가, 동맹인 튜턴족과 합류하였다. 이 시기, C. 마리우스는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기원전 102년 론강에서 튜턴족과 암브로네스족과 접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부족은 알프스 서부의 고개를 통해 이탈리아로 넘어가려 했었고, 킴브리족과 티구리네스족은 론강을 건넌 다음 중동알프스산맥을 거쳐 북쪽 경로를 넘어가려 했었다.
이제르강 지류에서, 튜턴족과 암브로네스족은 잘 방어된 진지를 구축해놓은 마리우스와 조우하였고, 이들은 통과할 수 없었다. 대신에 이들은 길을 찾기 시작했고, 마리우스를 이들을 추적하였다. 아콰이 섹스티아이에서, 로마군은 두 차례 전투에서 승전하고 튜턴족 왕 테우토보드를 포로로 생포했다.
킴브리족은 알프스를 거쳐 북부 이탈리아에 진입했다.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알프스의 고갯길을 방어하지 않았고, 대신 포강 뒤로 물러나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육상은 침입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킴브리족은 서두르지 않았고, 아콰이 섹스티아이의 승자들은 지원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원전 101년 세시아강과 포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벌어진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킴브리족의 오랜 여정이 마침내 멈추었다.
베르켈라이 전투는 킴브리에 전멸적인 패배였다. 루기우스와 보이오릭스 등 두 족장이 전장에서 전사했고, 나머지 족장들인 카이소릭스와 클라오디쿠스는 생포되었다.[12] 여성들은 노예가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자녀들을 죽이고 자결을 했다. 킴브리족은 전멸당하였고, 일부는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는데 상기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서기 1세기 윌란반도 북쪽에 킴브리족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포로 중 일부는 스파르타쿠스의 대의에 합류한 자녀들이 있었을 수 있으며, 그 중에는 제3차 노예 전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검투사들이었을 수 있다.[13]
유니아누스 유스티누스의 트로구스에 대한 발췌에서는 미트리다테스 6세가 동맹시 전쟁 동안 (기원전 91년~88년)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킴브리족에게 사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14] 유스티누스는 또한 킴브리족이 이때 다시 이탈리아에 있었다고 언급했는데 즉 10년 뒤에도 있었음을 의미한다.[15]
추정 상의 후예
[편집]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하면, 벨가이 부족 중 하나인 아투아투키족이 "킴브리족과 튜턴족의 후예이며, 이들은 우리의 속주와 이탈리아로 진격하던 중에 몰고 가거나 짊어지고 갈 수 없었던 가축과 물자를 라인강 가까운 쪽(즉 서쪽)에 내려놓고, 그곳에 6천 명의 병력을 남겨 경비와 주둔을 맡겼다."라고 한다('갈리아전기' 2.29, Edwards 번역). 이들은 벨가이의 에부로네스족이 다스리던 땅에 '아우아투카'(Atuatuca)라는 도시를 세웠다. 이에 에부로네스족의 왕 암비오릭스는 공물을 바치고 자신의 아들과 조카를 아우아투키족에 인질로 보냈다고 한다 ('갈리아전기' 6.27). 서기 1세기에, 에부로네스족은 게르만족계 퉁그리족에 사라지거나 흡수되었으며, 아우아투카 퉁그로룸(Atuatuca Tungrorum)으로 알려진 도시는 오늘날 통에런에 해당한다.
오늘날 힘멜란 사람들은 고대 킴브리족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킴브리족의 여정은 덴마크의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힘멜란 지역 출신이기도 한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의 소설로 '긴 여행'에 포함되어 있는 'Cimbrernes Tog'(1922년)에 묘사되어 있다. 안데르스 분고르가 조각한 이른바 킴브리의 숫소가 1937년 4월 14일 북윌란 지역의 중심 도시 올보르의 광장 중앙에 세워졌다.
이탈리아의 비첸차, 베로나, 트렌토 (일곱 지방 자치단체로 알려짐) 등지에 정착하여 킴브리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소수민족을‘침브리’라고 불린다. 수백 년간 걸쳐 이 고립된 약 4,000명의 인구 집단은 자신들이 로마에 패배하여 퇴각하던 킴브리족의 직계 후손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 이 지역에 정착한 바이에른계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이탈리아 북부에 소규모 독일어 사용 공동체가 존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중세(서기 11~12세기)의 이주설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16] 일부 유전학 연구에서는 이 지역의 대부분 사람들이 게르만이 아닌 켈트계 후예임을 보여주는 듯하며[17] 이 점은 접미사가 -ago < 켈트어 계통의 -*ako(n)로 끝이 나는 갈리아어계 지명에서 뒷받침 된다 (예시로 아시아고는 프랑스 지역 내 아제 (Azay), 에지 (Aisy), 아제 (Azé), 에지 (Ézy) 등 다양한 변영 형태와 분명히 같은 계통의 지명이며, 이 지역들 모두 *Asiacum < 갈리아어 *Asiāko(n)에서 비롯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지역의 본래 지명들, 특히‘침브로(Cimbro)’라고 알려진 특정 지역 언어에서 유래한 명칭들이 오늘날에도 더 현대적인 이름들과 함께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 점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가리킨다 (예로 아시아고는 침브로 지명인 'Sleghe'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독일 남부 지역과의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힘멜란 기원에 대한 믿음은 근대에도 계속되었다. 예시로 1709년에,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4세가 이 지역 주민들을 방문했고 자신들의 왕으로 칭송받았다.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자치를 유지하고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은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결과로 다수의 침브리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산악 지역을 떠나, 전세계의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였다.[18]
문화
[편집]종교
[편집]
킴브리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렬한 전사로 묘사된다. 그 군대의 뒤를 따라 여자들과 아이들이 수레를 타고 이동했다. 하얀 옷을 입은 노령의 여성들인 여사제들은 전쟁 포로를 제물로 바치며 그 피를 뿌렸는데, 그 피의 성질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트라본은 킴브리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하였다:
킴브리족의 아내들은 원정에 따라다녔는데, 그 곁에는 예언자 역할을 하는 여사제들이 함께했다. 이 여사제들은 백발에 흰 옷을 입고, 아마로 된 망토를 걸쳐 장식 핀으로 여미고, 청동 허리띠를 두른 채 맨발로 다녔다. 손에 칼을 쥔 이들은 진영 곳곳에서 전쟁 포로들을 맞이했으며, 먼저 그들의 머리에 화관을 씌운 뒤 암포라 약 20개 분량의 청동 그릇으로 그들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높은 단이 있었는데, 여사제가 그 위로 올라가 솥 위로 몸을 굽힌 채 들어 올려진 포로들의 목을 차례로 베었다. 그때 그릇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 피를 보고 일부 여사제들은 예언을 했고, 다른 이들은 시신을 갈라 내장을 살펴 자기 민족의 승리를 예언했다. 또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는 수레의 등나무 틀 위에 씌운 가죽을 두드려,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 스트라본, 지리학' 7.2.3, H. L. Jones 번역
만일 킴브리족이 실제로 윌란반도에서 왔다면, 이들이 희생 제의를 행한 증거는 1835년 윌란에서 발견된 하랄스케르 여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여인은 올가미 자국과 관통당한 피부가 뚜렷하며 매장되거나 화장된 것이 아니라 늪지에 던져졌다. 게다가 힘멜란에서 발견된 군데스트룹 가마솥은 스트라본의 문헌에서 묘사된 거 같은 희생제의용 용기였을 것이다. 양식 면에서, 가마솥은 트라키아의 은 가공품처럼 보이면서도, 세공된 모습은 켈트적 특성을 띠고 있다.[19]
언어
[편집]킴브리족이 켈트어 또는 게르만어 중에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결정하는 데 있어 주요 문제점은 그 당시 그리스인 및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세력권 북쪽에 있던 모든 집단들을 언어 기반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갈리아인, 켈트인 또는 게르만족으로 지칭하는 경향이었다. 카이사르는 '켈트인'과 '게르만인'을 구분한 최초의 작가들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정치적 동기를 두고 이런 구분을 하였는데, 라인강을 새로운 로마의 국경으로 설치하려는 그의 추진에 유리한 주장이었기 때문이었다.[20] 그렇지만, 카이사르와 타키투스를 언제나 신뢰해서는 안 되는데, 이 당시 이들은 개인과 부족을 게르만 또는 켈트 범주에 속하도록 했으며,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두 문화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두었다. 일부 고대 사료에서는 킴브리족을 게르만 부족으로 분류하지만,[21] 일부 고대 저자들은 켈트족에 킴브리족을 포함하였다.[22]
킴브리족의 언어에 대한 몇 가지 직접적인 증거들이 존재하며 북쪽의 대양 (발트해 또는 북해)을 가리켜, 대플리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23] "필레몬이 전하길 이곳은 킴브리족에 의하면 크로니움(Cronium)부터 루베아 곶(Rubea串)까지 모리마루사(Morimarusa) 즉 죽은 바다라고 불린다." 동시대 '바다'와 '죽은'을 뜻하는 갈리아어는 'mori'와 'maruo-'였던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그 형태가 잘 보존된 도서켈트어군의 동계어 'muir'와 'marbh' (아일랜드어), 'môr'와 'marw' (웨일스어), 'mor'와 'marv' (브르타뉴어) 등과 대응을 이룬다.[24] '바다'를 의미하는 동일 단어가 게르만어에서도 알려져 있으나, 'a' 형태를 하고 있으며 (*mari-), *maruo-의 동계어는 게르만어의 모든 방언에서 발견되지 않았다.[25] 그렇지만, 플리니우스가 킴브리 토착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단어를 들은 것이 아닌 점을 고려할 때, 그가 들었던 단어가 갈리아어로 번역된 것이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26]
알려진 킴브리 족장들은 보이오릭스 ('보이족의 왕' 또는 단어 그대로 '공격자들의 왕'을 의미), 가이소릭스(Gaesorix, '창의 왕"), 루기우스(Lugius, 켈트신 루구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추정) 등을 포함해 켈트어 인명을 갖고 있다.[27] 킴브리족의 언어에 대한 다른 증거는 정황적인 것들로, 기원전 101년 로마군과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로마인들이 킴브리족 진영에 갈리아 켈트인들을 첩자로 잠입시켰다는 기록이 전해진다.[28]
Jean Markale[29]은 킴브리족이 헬베티족, 좀더 상세하게는 켈트족으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티구리니족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연관성들은 200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공통의 조상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앙리 위베르[30]는"이 모든 이름은 켈트어이며, 그 외에 다른 언어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라고 하였다. 일부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31]
켈트족 기원에 대한 근거의 반박은 켈트어 지명은 존재하지 않고 대신 게르만어 지명만이 있는 윌란반도 북쪽에서 킴브리족이 본래 왔다고 하는 문헌적 증거에 있다.[31][32][33] 이 주장은 킴브리족이 갈리아에 거주하던 시기에 킴브리족의 갈리아화를 배제하지 않는다.[31] 켈트화 된 게르만어가 아니라면 켈트어 이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보이오릭스는 선조들의 땅 윌란 반도에서 이주해온 뒤 킴브리족의 왕이었다. 보이오릭스와 그의 부족들은 그의 생전 켈트인들 주변에서 거주했으며 J. B. 라이브스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서문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추가적으로 보이오릭스라는 이름은 게르만조어 또는 켈트어 어근 모두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27]
창작물
[편집]폴 앤더슨의 공상 과학 이야기 '파괴되어야 한다'는 대체 역사를 묘사하고 있으며 여기서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로마를 파괴하지만, 카르타고가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며 이탈리아가 완전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에 따라, 200년 뒤에 다가오는 킴브리족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킴브리족은 이 공백을 채우고, 이탈리아를 정복하며 토착민을 자신들의 문화로 동화시켜 20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르러, 이탈리아는 게르만어파의 언어를 사용하며 번영하고 기술적으로 진보한 왕국이 된다. 그는 또한 베르켈라이 전투 이후 로마인들의 노예가 된 킴브리 족장을 다루는 별도의 역사 소설 '번영의 슬라브족'(The Golden Slave)을 썼다.
킴브리족은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겨울밤의 나그네라면'에서 가상의 킴메르족과 전쟁을 벌이고 이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하는 가상의 정체(政體)로 언급된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Vasmer, Russisches etymologisches Wörterbuch, 1958, vol. 3, p. 62; Z. Gołąb, "About the connection between kinship terms and some ethnica in Slavic", International Journal of Slavic Linguistics and Poetics 25-26 (1982) 166-7.
- ↑ Nordisk familjebok, Projekt Runeborg.
- ↑ 스트라본의 '지리학' 7.2.2에서 포세이도니오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Bibl. 5.32.4; 플루타르코스, Vit.Mar. 11.11.
- ↑ Jan Katlev, Politikens etymologisk ordbog, Copenhagen 2000: 294; Kenneth W. Harl, Rome and the Barbarians, The Teaching Company, 2004.
- ↑ C. Rawlinson, "On the Ethnography of the Cimbri", Journal of the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6 (1877) 150-158.
- ↑ C. T. Onions and R. W. Burchfield, eds. The Oxford Dictionary of English Etymology, 1966, s. v. Cymry;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2002: 321.
- ↑ Kaul, F.; Martens, J. (1995). “Southeast European Influences in the Early Iron Age of Southern Scandinavia. Gundestrup and the Cimbri”. 《Acta Archaeologica》 66: 111–161.
- ↑ 지질학자로서 스트라본은 본인이 점진주의자을 밝혔으며 1998년에 고고학자 B. J. Coles는 해수면이 낮아졌을 때 북해에 형성되었다가, 빙상이 물러난 뒤 다시 침수된 연안 평야의 거주 및 수렵 가능한 땅을 "도거랜드"라 명명했다.
- ↑ Ptolemy, Geography 2.11.7: πάντων δ᾽ ἀρκτικώτεροι Κίμβροι "the Cimbri are more northern than all (of these tribes)"
- ↑
Beck, Frederick George Meeson (1911). 〈Cimbri〉 11판. Chisholm, Hugh (편집).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6.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368쪽. - ↑ Livy: Periochae 67
- ↑ Sampson, Gareth S. (2010). 《The crisis of Rome: the Jugurthine and Northern Wars and the rise of Marius》. Pen & Sword Military. 175쪽. ISBN 978-1-84415-972-7. 2012년 12월 1일에 확인함.
- ↑ Strauss, Barry (2009). 《The Spartacus War》. Simon and Schuster. 21–22쪽. ISBN 978-1-4165-3205-7.
marius german.
- ↑ Marcus Junianus Justinus, Epitome of the Philippic History of Pompeius Trogus, 38.3, 'In the next place, well understanding what a war he was provoking, he sent ambassadors to the Cimbri, the Gallograecians, the Sarmatians, and the Bastarnians, to request aid'
- ↑ Marcus Junianus Justinus, Epitome of the Philippic History of Pompeius Trogus, 38.4, 'all Italy, at the present time, was in arms in the Marsian war,... At the same time, too, the Cimbri from Germany, many thousands of wild and savage people, had rushed upon Italy like a tempest', The Latin text has not like this translation an imperfect and a pluperfect, but two perfect infinitives (consurrexisse... inundasse...)
- ↑ James R. Dow: Bruno Schweizer's commitment to the Langobardian thesis. In: Thomas Stolz (Hrsg): Kolloquium über Alte Sprachen und Sprachstufen. Beiträge zum Bremer Kolloquium über "Alte Sprachen und Sprachstufen". (= Diversitas Linguarum, Volume 8). Verlag Brockmeyer, Bochum 2004, ISBN 3-8196-0664-5, S. 43–54.
- ↑ Pozzato, G; Zorat, F; Nascimben, F; Gregorutti, M; Comar, C; Baracetti, S; Vatta, S; Bevilacqua, E; Belgrano, A; Crovella, S; Amoroso, A (2001). “Haemochromatosis gene mutations in a clustered Italian population: evidence of high prevalence in people of Celtic ancestry”. 《Eur J Hum Genet》 9 (6): 445–51. doi:10.1038/sj.ejhg.5200643. PMID 1143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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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turalis Historia, 4.95: Philemon Morimarusam a Cimbris vocari, hoc est mortuum mare, inde usque ad promunturium Rusbeas, ultra deinde Cronium.
- ↑ Ahl, F. M. (1982). “Amber, Avallon, and Apollo's Singing Swan”.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103: 399.
- ↑ Germanic has *murþ(r)a "murder" (with the verb *murþ(r)jan), but uses *daujan and *dauða- for "die" and "dead".
- ↑ Accordingly, Pokorny, Indogermanisches etymologisches Wörterbuch, 1959, p. 735, describes the word as "Gau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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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ll-Fialkoll, Andrew 편집 (2000). 《The Role of Migration in the History of the Eurasian Steppe: Sedentary Civilization v. "Barbarian" and Nomad》. Palgrave Macmillan. 117쪽. ISBN 0-312-21207-0.
- ↑ 〈Languages of the World: Germanic languages〉. 《The New Encyclopædia Britannica》. Chicago, Illinois, United States: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1993. ISBN 0-85229-571-5. This long-standing, well-known article on the languages can be found in almost any edition of Britannica.
외부 링크
[편집]- Kennedy, James (1855). “On the Ancient Languages of France and Spain”. 《Transactions of the Philological Society》 (11).
〈Cimbri〉 9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V. 1878. 780쪽.- 〈Cimbri〉. 《The New Student's Reference Work》. 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