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측우기(測雨器)는 조선 시대에 강우량 분포를 측정하던 기구로서,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이다. 조선 세종 때 처음 만들어 전국에 보급·시행하였다. 2010년 5월 현재 1837년 공주에 있었던 충청감영에서 제작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보물 561호)만이 남아 있으며, 정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의 관측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측우기는 유럽보다 200년 앞선 기술로 만들어져서, 조선의 과학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제작 및 제도의 시행[편집]

제작[편집]

조선 초기에는 농업 등에 참조하기 위해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비온 후에 고여 있는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흙에 스며드는 정도가 서로 달라 1441년(세종 23년) 음력 8월 장영실을 시켜 서운관(書雲觀)에서 빗물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릇을 처음 제작하게 하였고, 한양을 중심으로 관측에 활용하였다. 1442년(세종 24년)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정하여 서운관에서 빗물의 깊이를 측량·기록하게 했으며, 지방에서는 각 관가의 뜰에 설치하여 수령 자신이 측량·기록하게 했다. 처음에는 쇠로 만들었으나 뒤에는 구리로 만들기도 하였고, 이외에 자기·도기로 대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탈리아의 가스텔리보다 약 2백 년 앞선 것이다. 측우기는 흔히 장영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는데, 세종실록 23년 4월 을미(양력 1441년 5월28일)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는 기록은 문종에 의해 발명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도의 시행[편집]

측우기가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것은 1442년(세종 24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서 측우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로 제작된 측우기는 길이 1척 5촌(약 32㎝), 지름 7촌(약 15㎝)이며, 비가 그친 후 주척(周尺)을 써서 푼(分) 단위까지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과 그친 시간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도록 했다.[1]

측우대[편집]

측우기는 대(臺) 위에 올려놓고 측정하게 하였는데, 적절한 높이의 대는 주변의 빗물이 튀어 측우기에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2]

현전하는 조선 시대의 측우대는 다음과 같다.

기타[편집]

비의 양을 재기 위해 청계천 마전교에는 수표가 세워졌다

각주[편집]

  1. 《세종실록》 96권, 5월 8일자 기사
  2. 조희구·나일성, 〈18세기 한국의 기후변동 -강수량을 중심으로- 〉, 《동방학지》, 22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