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최윤의(崔允儀, 1102년 ~ 1162년)는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초명은 최천우(崔天祐)이다. 최충(崔冲)의 현손이다.

생애[편집]

어려서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음서로 벼슬을 얻게 되자 나왔다.

1128년(인종 6)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로 있을 때 문과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고, 이듬해 태학박사(太學博士)에 임명되었다가 우정언(右正言)·지제고(知制誥)로 옮겼다.[1]

1133년(인종 11) 다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옮겼고[2], 1136년(인종 14)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전중감(殿中監) 윤언식(尹彥植)과 함께 금에 파견되어 태종(太宗)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지냈다.[3]

1148년(의종 2)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우상시(右常侍) 최함(崔諴) 등과 함께 내시(內侍) 김거공(金巨公)과 환자(宦者) 지숙(之淑) 등 7인을 논박하고 그들을 쫓아 낼 것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자, 3일 동안 대궐문 밖에 엎드려 극력히 간언하자 왕이 드디어 들어주었다.

같은 해 시예부시랑(試禮部侍郞)과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며[4],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하여 양충찬(梁忠贊)·박유시(朴有時) 등 91인을 선발했다.[5]

1151년(의종 5) 어사대부(御史大夫)·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옮겼고, 이듬해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와 태자태부(太子太傅)가 차례로 더해졌다.[4]

1153년(의종 7) 수충좌리공신(輸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예부상서(禮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1]

이듬해 지공거(知貢擧)로서 문과를 주관해 황보탁(皇甫倬) 등을 급제시켰고[5], 같은 해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수국사(修國史)를 지냈다.[1]

1155년(의종 9)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를 겸했다가[4], 같은 해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에 임명되는 동시에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로 나갔는데[1][6], 한 달도 되지 않아 동북면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판중군병마사(判中軍兵馬事)로 옮겼다.[4]

이듬해 수태위(守太尉)·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가 더해졌다가, 1157년(의종 11)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했다.[1]

같은 해 왕이 금오위(金吾衛)의 제상리(堤上里)에 이궁(離宮)을 세우려고 했는데, 최윤의가 간절하게 간언하여 끝내 그만두었다.[4]

그러나 왕이 문하성(門下省)의 관리들에게 정함(鄭諴)의 고신(告身)에 서명할 것을 독촉했을 때는 좌승선(左承宣)·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이원응(李元膺), 우승선(右承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공승(李公升), 우간의대부(右諫大夫議) 최응청(崔應淸) 등과 함께 부득이하게 서명했다.[3]

1161년(의종 15) 판예부사(吏禮部事)를 추가로 겸했고,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더해졌으며.[1], 이듬해 다시 지공거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이계원(李繼元) 등 32인을 급제시켰다.[5]

같은 해 61세로 졸하자 왕이 수태사(守大師)·문하시중(門下侍中)·상주국(上柱國)·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侯)를 추증했으며,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후에 의종(毅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7]

평가[편집]

『고려사』는 최윤의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벌열(閥閱)에서 생장하여 요직만을 두루 거쳤지만, 논의가 명백하고 일처리가 공정했다. 관리의 선발을 맡아서는 고과와 평정이 공평하고 성실하여 어진 인재를 임용하였다. 또 문장에 능하여 두 차례나 지공거를 맡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적임자라고 칭찬하였다.

기타[편집]

왕명으로 『상정고금예문 詳定古今禮文』 50권을 편찬했는데, 고종(高宗) 때[8] 금속 활자로 인쇄되어, 오늘날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 알려졌다.

가족 관계[편집]

  • 증조 - 최유선(崔惟善, ? ~ 1075년) : 수태사(守大師)·문하시중(門下侍中)·판이부사(判吏部事)·상주국(上柱國), 문화공(文和公), 문종(文宗)의 배향공신
    • 조부 - 최사제(崔思齊, ? ~ 1091년) : 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 양평공(良平公)
      • 아버지 - 최용(崔湧, ? ~ 1119년)[9] : 증(贈) 수사공·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판공부사(判工部事)·주국(柱國)
      • 어머니 -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예병부사(判禮兵部事)·감수국사·상주국, 문정공(文貞公) 김상기(金上琦, 1031년 ~ ?)의 딸
        • 부인 -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大師)·호부상서(戶部尙書)·삼사사(三司使) 김의원(金義元, 1066년 ~ 1148년)의 차녀[1]
          • 장남 - 최관(崔寬)[1]
          • 차남 - 최겸(崔謙)[1]
          • 첫째사위 - 최장(崔樁)[1]
          • 둘째사위 - 김지당(金至當)[1][10]
          • 셋째사위 - 이각(李慤)[1]

형제에 대해서는 아버지 최용 문서를 참조하라.

각주[편집]

  1. 김우번(金于蕃), 『최윤의 묘지명』
  2. 『고려사』 「인종세가」
  3. 『고려사절요』
  4. 『고려사』 「의종세가」
  5. 『고려사』 「선거지」
  6. 『고려사』 「의종세가」에는 이 해의 판이부사·서경유수사 임명 기사에 최윤의가 아닌 최자영(崔子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서로 모순이 생긴다.
  7. 『고려사』 「최윤의전」
  8. 1234년(고종 21)에서 1241년(고종 28) 사이로 추정된다.
  9. 『고려사 최윤의전』에는 최충(崔冲)의 현손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최용 처 김씨 묘지명』, 『최윤의 묘지명』에 의해 아버지가 최용임이 밝혀졌다.
  10. 김보당(金甫當)의 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