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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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백(崔婁伯, 미상 ~ 1206년 1월 11일(음력 1205년 12월 1일))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수원이다.

생애[편집]

수원 향리 최상저의 아들이다.

15세 때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죽자 최루백이 범을 잡아 아버지의 뼈와 살을 범의 배 안에서 찾아 개울가에 묻었다.[1]

1124년(인종 2년)에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인 염경애(廉瓊愛)와 결혼했다.[2]

1145년(인종 23년)에 사직(司直)에서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겼다.[2]

1146년(인종 24년) 1월 28일에 부인이 사망했다.[2]

1146년(의종 즉위년) 여름에 우사간에 올랐고 12월에는 좌사간으로 옮겼다.[2]

1147년(의종 1년) 봄에 시어사로 옮겼다가 겨울에 예부원외랑으로 좌천되었으며, 1148년(의종 2년) 봄에 예부 낭중으로 옮겼다가 다시 청주부사에 임명되었다.[2]

1153년(의종 7년)에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하례하게 했다.[3]

1155년(의종 9년)에 왕이 최자영, 양원준, 최루백 등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4]

1158년(의종 12년)에는 국자제주(國子祭酒) 염직량과 함께 윤돈서 등 16명을 뽑았다.[5]

1205년(희종 1년) 12월 1일에 사망했다.[6]

사후[편집]

최루백의 정려비가 화성시 봉담읍 수기리에 있다가 분천리로 이전되었다.

작품[편집]

1148년(의종 2년)에 첫번째 부인인 염경애을 위한 묘지명인 「염경애 묘지명」을 지었다.

가족관계[편집]

부인 염경애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으며, 염경애가 죽은 후 유씨(柳氏)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6]

  • 부인: 염경애(廉瓊愛, 1100년~1146년 3월 12일(음력 1월 28일))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
    • 아들 [7]
      • 장남: 최돈인(崔敦仁)
      • 차남: 최돈의(崔敦義)
      • 삼남: 최돈례(崔敦禮)
      • 사남: 최돈지(崔敦智)
      • 장녀: 최귀강(崔貴姜)
      • 차녀: 최순강(崔順姜)

참고 자료[편집]

  • 『고려사』
  • 최루백, 「염경애 묘지명」(김용선 편,『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 (상)』(개정중판),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 「최루백 묘지명」(위와 같음)

각주[편집]

  1. 『고려사』 권121, 「열전」34, 최루백
  2. 최루백, 「염경애 묘지명」
  3.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7년(1153) 11월
  4.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9년(1155) 9월 2일(병오)
  5. 『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과목2, 승보시, 1158년(의종 12년) 9월
  6. 「최루백 묘지명」
  7. 아들의 이름은 「최루백 묘지명」에 따른 표기이며, 「염경애 묘지명」에는 각각 단인(端仁), 단의(端義), 단례(端禮), 단지(端智)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