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동두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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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동두천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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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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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2차 동두천 전투한국 전쟁에서 중공군에 의해 패배한 대한민국 국군동두천에서 벌인 전투였다. 동두천 방어 전투라고도 불린다.

원인[편집]

1950년 11월, 중공군이 인해 전술로 의주를 비롯한 압록강 유역의 대한민국 국군을 기습공격하자, 국군은 평양, 흥남, 함흥, 원산 등 주요 도시를 공산군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중공군은 이에 힘입어 38도선을 넘어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국군과 미군경기도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연천, 동두천, 파주를 이은 방어선을 구축했다.

경과[편집]

중공군과의 전투[편집]

1950년 12월 10일, 중공군은 38도선을 돌파하고 연천과 포천을 장악하였다. 이에 국군은 동두천을 거점으로 하여 소요산, 파주, 양주를 잇는 선을 최방어선으로 삼고, 남하하는 북한군중공군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었다. 12월 11일, 동두천에서 국군과 미군, 영국군은 중공군과 맞닥뜨렸으나 파주가 이미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동두천 철수[편집]

1950년 12월 후반부터 국군, 미군, 영국군은 고전하게 된다. 그 까닭은 국군이 동두천을 비롯한 경기도 북부를 방어하고 있는 틈을 타 경기도 동부의 가평 일대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공군의 인해 전술과 주변 방어선의 붕괴, 그리고 군사의 열세로 연합군은 동두천에서 철수 준비를 한다.

결과[편집]

1951년 1월 3일까지 동두천에서의 전투가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한강 이북 지역은 공산군의 공격으로부터 결코 안전할 수 없었다. 결국 1951년 1월 4일, 국군과 UN군서울을 내주고 만다. 고양을 비롯한 주요 수도권 방어선도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UN군과 국군이 무사히 철수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공산군의 진군 속도를 크게 늦추어 주어 신속한 대응전을 감행할 수 있게 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