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휘(鄭暉, 1305년[1] ~ ?)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희계(鄭熙啓)의 아버지이다.

생애[편집]

일찍이 원의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郞)을 역임했으나[2],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할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공민왕(恭愍王)의 반원 정책에 동조한 듯하다.

1358년(공민왕 7)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들어갔고, 같은 해 삭방도군민만호부(朔方道軍民萬戶府)의 만호(萬戶)를 겸했다가, 이듬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승진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2차 침입 때에는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에 임명되었다.[3]

이후 홍주목사(洪州牧使)를 거쳤다가[4],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고[5],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6]

가족 관계[편집]

  • 증조 - 정교(鄭僑)[7] : 사재경(司宰卿)
    • 조부 - 정공단(鄭公但)[7] : 삼사정랑(三司正郎)[8]
      • 아버지 - 정자초(鄭子楚)[7] : 유비창승(有備倉丞)
      • 어머니 - 미상
        • 부인 -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화평부원군(輸化平府院君), 충숙공(忠肅公) 김심(金深, 1262년 ~ 1338년)의 7녀[7][9]
          • 외아들 - 정희계(鄭熙啓, ? ~ 1395년) :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계림군(雞林君), 양경공(良景公)

각주[편집]

  1. 『목은집』에 의하면 1304년(충렬왕 30) 생인 염제신(廉悌臣)·윤환(尹桓)보다 1살 아래였다고 한다.
  2. 『고려사』 「정지상전」
  3. 『고려사』 「공민왕세가」
  4. 『고려사』 「김방경전」
  5. 『태조실록』
  6. 『목은집』
  7. 『씨족원류』
  8. 삼사에는 정랑이란 관직이 없었다. 정랑과 같은 정5품 관직인 삼사판관(三司判官)의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9. 『김심 묘지명』에 의하면, 1339년(충숙왕 복위 8) 당시 김심의 딸 7명 중 막내딸만이 시집가지 않았다. 『씨족원류』와 종합해 보면, 바로 이 딸이 정휘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