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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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 대전
교전국
진(秦) 조(趙)
지휘관
왕흘, 백기 염파, 조괄
병력
650,240명 이상 500,000여명
피해 규모
250,000여명 50,000여명(전사), 200,000-400,000명(매장)

장평 대전(長平大戰) 또는 장평 전투(중국어: 長平之戰, 병음: Chángpíng zhī zhàn)는 기원전 262년에서 기원전 260년에 걸쳐 중국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회전이다. 중국의 전국 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장평의 승리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조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였다. 중국의 고전에도 이 전투를 상당히 중요한 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발단[편집]

전투의 진행[편집]

양국이 상당에서 부딪히다[편집]

서력전 260년 4월, 진나라의 장수 왕흘은 군사를 이끌고 상당[1]을 접수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군민들은 조나라로 도망간 상태였고, 진나라의 지도부는 왕흘에게 상당 군민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조나라는 명장 염파를 파견하여 군민들을 접수하고 진군을 막게 하였다. 양국 군대는 중원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장평에서 부딪혔다. 초기의 움직임은 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진군은 염파의 심리전에 밀리고 말았다. 간헐적인 전투에서 승리는 계속 거두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얻지 못한 상태였다. 염파는 장평에 강력한 보루를 쌓고 진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6월과 7월의 맹공은 진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진군은 6국이 합종하여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심하게 동요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조군이 승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진의 승부수[편집]

당시 양국 조정은 나름대로 초조했다. 당시 상황이 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성왕은 다급했다. 방어만 하고 있는 염파가 자신의 자존심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진은 이 싸움에서 밀리면 6국에 위신이 떨어지게 되며, 통일을 향한 길은 더욱 험난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게다가 당시 재상이었던 범수는 이미 몇 차례의 실책으로 징계를 받았다. 이번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그의 몰락은 자명한 일이었다. 진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범수는 두 가지 승부수를 띄웠다. 우선 당시 지휘관이었던 왕흘을 몰래 백전노장 백기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이를 발설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하였다. 이를 조에서 알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염파가 전장을 지휘하면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이간책을 써서 지휘관을 바꾸기로 하고 조나라 내부에 첩자들을 투입하여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염파가 진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뒤에서 진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이 두려워하는 것은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효성왕은 염파를 지휘관 자리에서 내치고 대신 조괄을 임명하였다.

지휘관이 교체되다[편집]

새로운 지휘관, 조괄의 부친은 명장 조사(趙奢)였다. 그는 생전에 진의 군사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력이 있었던 장수였다. 그는 병사들을 아꼈고, 욕심이 없어서 전투에서 이긴 후 왕에게 하사받은 은상은 병사들에게 모조리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조사는 정작 자기 아들을 천거하기는 꺼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조괄은 병법에 통달한 수재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외우기만 한 병법을 실전에 응용하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거들먹거리고 뽐내는 것을 좋아했다 한다. 그래서 조나라의 조정에서 조괄을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자 조괄의 어머니는 조정에 아들을 천거하면 안 된다는 건의까지 올렸으나, 이는 무시되고 말았다. 반면, 진군의 새로운 지휘관인 백기는 백전노장이었다. 당시 수많은 강대국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백여 개가 넘는 성을 빼앗을 정도의 공적을 거둔 장수였다. 이러한 지휘관에게 조괄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전투의 결말[편집]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결말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한꺼번에 40만이라는 엄청난 포로를 받게 된 진나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진나라에는 없었다. 결국 백기는 끔찍한 선택을 했다. 백기는 조나라 군사들이 조를 나누어 구덩이를 파게 한 후, 그곳에 군사들을 묻어버렸으며[2], 전투 후에 취한 조나라 군사들의 수급을 모아 영루(營壘)에 쌓게 하였다. 백기는 이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이 산 꼭대기에 지은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 불렀다<ref>. 훗날 한 시인이 이 참담한 장면을 다음의 시로 지었다 전한다.

高臺八尺盡頭顱

何止區區萬骨枯
矢石無情緣鬪勝
可憐降卒有何辜

팔 척 백기대 모두가 두골이니,
장수가 공 이루려면 일만의 뼈가 뒹군다는 것은 옛말이라네,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니 화살과 돌에는 사정이 없다하나,
항복한 군사에게는 무슨 죄가 있을까

이러한 행동으로 얻게 된 효과는 상당했다. 당시 다른 5국에 경고하는 의미(진나라에 대항하는 자는 죽음 뿐이다)도 있었으며, 조나라에게는 항전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남자들이 거의 남지 않게 된 조나라는 이후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한 조나라는 결국 약 30년 후인 기원전 228년 멸망하고 말았다.

관련 인물[편집]

군주[편집]

장수[편집]

각주[편집]

  1. 상당(上黨)은 한(韓)의 영토로 진(秦)이 공격한 곳 이다(기원전263년). 조(趙) 효성왕에게 상당을 얻으면 큰 이익이다라고 한 사람이 평원군(平原君)이다. 이일이 진의 분노를 사게된다.
  2. 이 때, 진중에 있던 어린 아이들은 전부 조나라로 돌려보냈으니, 그 수는 250명 정도였다고 한다. 나머지는 전부 매장했다.

외부 링크[편집]